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유히유영 Sep 03. 2019

결국 간판 따려고 대학갔다

키워드(서점, 대학, 행복) 에세이  by 믹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몇 가지 꼽아 본다면?


이 질문에 늘 빠지지 않는 답이 있다. 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다. 그 순간의 감격은 19년이 지났어도 잊히지 않는다. 근 10년을 대학 하나만을 보고 달려왔으니 그럴 수밖에. 지긋지긋한 입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희에,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평소보다 수능 점수가 잘 안 나와서 내가 원하던 대학에 합격한 건 아니었지만, 재수는 싫었다. 입시 공부를 이 이상 열심히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기도 싫었고. 대학에서 새로운 공부를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해 왔던 ‘뭔지도 모르는 걸 달달 외우는 짓’은 더 이상 안 해도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강한 확신은 강한 부정으로 다가왔다. 대학 합격의 기쁨은 순간, 찰나의 행복이었다. 정작 대학에 가서는 마냥 행복하지 않았다. 날 좋아하는 애들, 싫어하는 애들 틈에서 헉헉대며 관계 싸움을 해야 했고, 그 와중에서도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쳐야 했다. 새로운 공부는 개뿔, 암기식 시험공부는 대학에서도 계속 되었다. 


학문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도 높은 학점을 받는 건 가능했다. 벼락치기로 학점 관리는 잘 했지만, 과 활동과 연애질에 빠져 대학 2년은 훌쩍 가버렸다. 3학년 때부터는 고시 공부를 시작해, 수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암기식 공부의 바다에 풍덩 빠져서 허우적댔다. 덕분에 나는 정치와 외교가 뭔지도 잘 모른 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간판 따려고 대학가냐?”는 말을 흔히들 한다. 그 물음 앞에만 서면 나는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맞다. 난 대학가서 간판만 땄다. 그걸 인정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 잘난 맛에 살다가, 지금의 남편 Y를 만나고 나서 내가 속 빈 강정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Y는 정치외교학 전공자인 나보다 그 분야를 잘 알았다. Y는 공대를 나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겨우 졸업만 했다. 대학 시절에 전공 공부는 안 하고,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다독하며, 재미있게 공부했다고 한다. 전공 학문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운 건 나와 마찬가지였지만, Y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학문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그게 나와 다른 점이었다. 


서재와 우리 둘째 고양이


“저 많은 책을 진짜 다 읽었어?”
“거의 다 읽었지”


신혼집 한 쪽 벽에는 Y의 책들로 가득했다. 알고 싶은 게 생기면 관련 책을 다 사서 탐독하다보니 지금처럼 책이 많아졌다고 한다. 책값이 어마어마했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Y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읽지도 않을 책 많이 산다고 아버지에게 많이 혼났어. 책 사면 정말 다 읽는다고 말씀드렸는데도 믿지 않으시더라고.” 


Y의 방대한 지식과 사고의 변화는 다 책에서 온 거라고 했다. Y가 날 가르치려 든다는 느낌이 들 때는 화를 내기도 했다. 허나 그건 다 내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대체로 우리의 대화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주제로 즐겁게 이어졌다. 소크라테스에게 질문하는 제자가 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서점을 다니기 시작한 게 말이다. Y와 이야기하면서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걸 인정하게 됐고,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렇다고 정치외교학을 다시 공부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학문을 연구하고 싶었다면 대학원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크고, 더불어 나를 둘러싼 세상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런 내게 서점은 천국이었다. 책 표지만 봐도 설레었고, 흥미로운 주제의 책을 사재기하듯 사서 읽었다. 실제로 책이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제현주 작가의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일하는 마음>은 이직과 퇴사 결정에 큰 역할을 했다.) 연예인도 별로 안 좋아했던 내가 저자 덕질이라는 것도 하게 만들었다. 


대학 합격 소식 같은 ‘찰나의 행복’도 있지만, 서점 다니는 ‘일상의 행복’이란 것도 존재한다. 두 행복이 화음을 이룬 멜로디가 되어, 내 삶을 아름답게 연주하는 중이다. 롱 저니(long journey)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이 같은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다. 




*notice
유유히유영은 유자까, 믹서, 멸종각 세 작가가 함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최근 세 작가는 한 주에 하루, 시간을 정해놓고(약 1시간 반) 같이 글쓰기를 합니다. 무작위로 적은 16개 단어 중 3개를 뽑아 관련 글을 작성해요. 형식은 자유입니다. 같은 키워드가 주어지지만, 각자 다른 느낌으로 글을 쓰기에 다양한 글이 나옵니다. 앞으로 매주 키워드 단편집에 이날 쓴 글들을 올리겠습니다. 이번 키워드는 '서점', '대학', '행복'입니다. 일로 인정받기에 자기를 모두 갈아 넣어 왔던 작가 '믹서'의 에세이가 첫 글입니다.  
이전 08화 서점에서 느낀 첫 행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