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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히유영 Oct 21. 2019

일상에 등급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있나요?

키워드(반려동물, 우주, 요리) 에세이  by 믹서

가만 생각해 보면, 난 참 나 중심적이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해야 성에 찬다.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 않아, 삶에 여백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 성향이라고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내 성향을 썩 좋아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피곤한 성격이다. 


그러니 일상에서 경험하는 스트레스 양이 만만치 않다. 특별히 무슨 일이 없어도 시간을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다 보니, 기본적으로 쌓이는 스트레스가 항상 존재한다. 거기에 의미 부여까지 하기 시작하면 스트레스는 폭발 직전까지 간다. 예전에는 이를 풀 방법이 없었다.


몇 년 사이 내 상황이 달라졌다. 이전처럼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나는 습관적으로 반려묘 리앙이와 랭이를 관찰한다. 세상 귀여운 모습에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내 눈은 하트가 된다. 아이들을 쓰다듬고 뽀뽀하고 놀다 보면 행복해진다. 스트레스로 쌓인 나쁜 호르몬들이 아이들로 인해 생긴 좋은 호르몬으로 중화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물론 곧 아이들에게 매우 미안해진다. 이기적인 고양이 집사라는 마음에. 


대체 내 상황과 마음이 반려묘들에게 왜 미안한 일일까. 이기적이란 말은 또 뭐고 말이다. 바로, 내 주변의 모든 존재를 도구화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사랑한다고 느끼는 존재들마저 나를 위한 존재로 만드는 '나 중심적 사고'가 무섭고 미안하다. 반려동물과 함께 있는 시간조차 나를 위한 시간으로 해석해내는 나 자신이 소름 돋게 싫다. 


물론,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 자체가 심히 좋아서, 나쁜 호르몬을 중화시키기까지 할 거라는 상상을 한 것일 수 있다. 그래도, 귀여운 아이들을 나의 나쁜 호르몬을 중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건 어처구니없다. 자연스럽게 돋아나는 그 생각의 뿌리는 대체 뭘까. 내 안에 있는 악마 같은 본성일까.

바라만 보고 있어서 행복한 두 존재

주변 모든 상황을 나를 위해 도구화하는 사고는 고양이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침마다 토마토를 갈고, 끼니마다 요리하는 시간에도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시간은 내 건강을 위한 것일 뿐, 요리 자체가 주는 기쁨과 즐거움은 없다. 나는 요리하는 일에 무척 인색하다. 게다가 토마토 갈아먹는 시간은 무슨 의식 같다. 주문처럼 “건강해져라, 건강해져라” 읊조린다. 


요리할 때는 팟캐스트를 듣거나, TV를 틀어 놓고 정보를 습득한다. 요만큼의 틈도 용인되지 않는 일상에서, 요리의 우선순위는 매우 낮다. 가치가 낮은 요리를 도구화하는 과정은 필연적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등급의 것들은 상위 등급에 먹혀 도구화된다. 최상위 등급의 ‘일’(보통 ‘영상 편집’을 일컫는 말)이 있는 경우, 그보다 낮은 단계의 TV는 일의 도구가 된다. 일하다가 식사를 해야 하는 경우, TV는 머리 식힘의 도구가 된다. 요리보단 등급이 높지만, 일보다 아래 등급일 경우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먹이사슬 같은 일상의 등급, 도구화는 내 삶의 여백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심지어, 잠들 때까지 계속된다. 불면증이 있기도 하지만, 자기 전까지 무언가 채우려고 하는 피곤한 성향도 잠을 방해한다. 여기에 더해, 몇 년 전부터 침대에 누우면 날 유혹하는 것이 생겼다. 바로 ‘꿀잠 영상’이라 불리는 우주 다큐다. 성우의 조곤조곤한 내레이션에 스르르 쉽게 잠들 수 있게 되었고, 우주 관련 지식도 얻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한 3년 정도 자기 전에 우주 다큐를 보다 보니 천체 물리학, 지구과학, 진화 등 과학에 관심도 생겼다. 백 번은 본 것 같은 ‘우주의 끝을 찾아서’라는 다큐는 내레이션을 외울 정도가 됐다. 우주는 나의 잠을 위한 도구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등급이 높아져서 따로 시간을 내어 우주 관련 책을 사서 보기도 하고, 관련 영상을 찾아보는 정도까지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언젠가부터 나와 다른 성향의 남편과 자주 부딪힌다. 가끔은 내 일상에 나조차 숨이 차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내겐 촘촘히 분류된 일상의 등급이 있다는 걸 깨닫고, 반려묘들을 보면서도 ‘난 참 생각보다 이기적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택했던 일들이 어쩌면 나를 기계로 만들고 있지는 않았나 의심하면서. 


최근 내 마음이 조금씩 동하고 있다. 등급을 매길 게 아니라, 일상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일들에 고유의 가치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각각의 시간을 오롯이 누리고 싶어진다. 있는 그대로 무언가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커졌기 떄문이다.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 않을까. 이런 마음도 등급을 먹이는 것일까? 




*notice

유유히유영은 유자까, 믹서, 멸종각 세 작가가 함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최근 세 작가는 한 주에 하루, 시간을 정해놓고(약 1시간 반) 같이 글쓰기를 합니다. 무작위로 적은 16개 단어 중 3개를 뽑아 관련 글을 작성해요. 형식은 자유입니다. 같은 키워드가 주어지지만, 각자 다른 느낌으로 글을 쓰기에 다양한 글이 나옵니다. 앞으로 매주 키워드 단편집에 이날 쓴 글들을 올리겠습니다. 이번 키워드는 '반려동물', '우주', '요리'입니다. 일로 인정받기에 자기를 모두 갈아 넣어 왔던 작가 '믹서'의 에세이가 첫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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