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서점, 대학, 행복) 에세이 by 멸종각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에 깊은 감명을 받던 세대였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 외마디 독백은 오히려 ‘행복의 정확한 척도는 너의 학벌부터 시작된다’는 강력한 메시지, 그 자체였습니다. 20여 년 전, 대학 입시라는 날카로운 일상이 저를 베어 넘기기 전부터 말이지요.
X세대라 불리는 우리 세대 전반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매일 그 논리를 학습당했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본 후, 깊은 ‘빡침’이 아니라 깊은 ‘감명’이 우리 세대를 움직였던 것도 바로 그런 현실 인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절보다, 지금 바로 오늘이 더 빡빡하고 숨이 턱 막힌다 느껴집니다. 사회가 그런 절망에서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직면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우리 시대에 대해 조금 순진한 생각을 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아무리 기득권이 더 많이 더 높게 더 깊이 자기들의 세계를 철옹성처럼 구축했다 하더라도, 사회 다수가 정신을 차리고 산다면, 그들의 영향력이란 실제 권력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여겨 왔습니다. 그러한 ‘다수의 바른 정신’이 동시대의 가장 큰 명분과 대표 이미지를 만들고 자본과 권력도 순응하게 만들 테니까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동시대를 아우르는 바른 정신은 시대정신이라 압축할 수도 있고 한 세대의 투쟁을 총망라하는 역사로도 환원해 볼 수 있습니다. 굉장히 단순하게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지식’으로 ‘바로 설명이 가능하다’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지식이란, 포털일 수도 있고, 가족들의 ‘깨톡’일 수도 있습니다. 뭐 좀 더 기품 있게 ‘우리 시대의 책’들로 소환해 볼 수도 있고요. 이런 생각들로 우리 시대의 서점으로 걸어 들어가 보면, 베스트셀러 목록 앞에서 무너지는 오늘이지만 말입니다.
행복은... 네, 좀 더 큰 무엇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모습으로 ‘내가 사는 오늘에 불러올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답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아니면 서점에서든 목적을 가지고 ‘깔맞춤’되어 나열한 온갖 지식을 만납니다. 자본과 권력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담고 있는 바로 그 지식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던 책이 말해 주었듯, 제목 그 자체에 담긴 '현실적 서열이 행복이라고 말해주는 반전 지식들' 말입니다.
그 수많은 지식들 앞에 서서 ‘지금 나는 안녕한가’, 조금 더 나아가 ‘지금 너와 지금 우리는 안녕한가’라는 질문이 더 많이 더 높게 더 깊게 쌓여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지식을 통해, 진짜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너도 그렇게 우리 모두가.(<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를 보고 자란 세대가 최악의 성적 경쟁을 부추긴 세대가 된 건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notice
유유히유영은 유자까, 믹서, 멸종각 세 작가가 함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최근 세 작가는 한 주에 하루, 시간을 정해놓고(약 1시간 반) 같이 글쓰기를 합니다. 무작위로 적은 16개 단어 중 3개를 뽑아 관련 글을 작성해요. 형식은 자유입니다. 같은 키워드가 주어지지만, 각자 다른 느낌으로 글을 쓰기에 다양한 글이 나옵니다. 앞으로 매주 키워드 단편집에 이날 쓴 글들을 올리겠습니다. 두 번째 키워드는 '대학', '행복', '서점'입니다. 이번 글은 상실의 시대에서 희망을 꿈꾸다 좌절한 멸종각의 에세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