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내가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by 유자까
대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이었다. IMF가 막 시작됐던 1997년 12월,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다. 남들 다 피는 담배였지만, 내게 담배는 조금 특별했다. 학보사에서 담배를 물고 글을 쓰던 선배들의 모습을 동경해 따라 하는 아이 같은 행동이기도 했고, 바른 길이라 배워 왔던 어린 시절 교육에서의 탈피이기도 했다. 거기에 급격히 어려워진 경제 사정에 부담을 얹는 행위였다.(끊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는데 말이다.)
종강 파티가 있던 날, 새우깡을 안주 삼아 소주를 비우던 동기들과 800원짜리 디스(This)를 피우며 석별의 인사를 나눴다. 내 폐는 담배를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담배가 처음이었던 나는 계속 콜록 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래도 친구들을 따라 몇 번 피고 나니, 폐와 담배는 금세 익숙한 사이가 된 느낌이 들었다. 어른이 된 것 같은 밤이었다. 유치하게도 고등학생 때 피우지 않은 걸 후회할 정도였다.
98년 3월, 새 학기를 맞은 강의실에는 복학한 선배들로 가득했다. 복학한 선배들과는 금방 친해졌다. 나는 형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무척 잘 따랐다. 그렇다고 무언가 얻어먹지는 못했다. 경제가 어려우니 형들은 항상 싼 곳을 찾았고, 계산은 늘 더치페이였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인근 학교 학생식당이 100원이라도 더 싸다면, 형들은 그곳으로 가려고 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어른스럽게 디스를 꺼내 물곤 했다. 당시 88라이트를 피우던 형들은 “어린놈이 비싼 담배 피운다”고 나를 놀렸다. ‘솔’을 피우던 형들은 “마일드한 담배를 피우는 건 여자와 어린애나 하는 짓”이라고 타박했다. 몇 개월 만에 내 담배질은 어린애 장난이 되었고, 독한 담배를 피워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복학생들에게 독한 존재는 담배가 아니었다. IMF를 맞은 경제 상황이었다. 형들은 한국경제가 고점을 찍으며 승승장구하던 1995~6년 입대했다. 전역해 학교에 돌아갈 시기가 되니, 경제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졸업 후에도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매일 술과 담배로 캄캄한 앞날을 함께 고민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다들 잘 살고 있으려나?)
아직 군대라는 도피처가 있다는 사실이 내게 위안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다시 어두운 현실을 피하는 어린아이 같은 심정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내 고민은 달랐다. 뭐랄까? 조금 우습지만, 난생처음 사회 정의를 고민했다고 해야 하나.
당시 학보사라고 하면 고등학생 때까지 배우지 못했던 사실을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운동권이라 불렸던 선배들은, 내가 몰랐던 한국 사회를 설명해 주며, 세상을 바꿔갈 구호를 외쳤다. 선배들 권유로 읽은 <아리랑>, <태백산맥> 같은 소설은, 내가 배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들과 술잔을 나누고, 함께 담배를 태우며 나눈 이야기들은 새날을 고대하게 했다. 그땐 내가 이 나라를 책임진 큰 어른처럼 느껴졌다.
생각이 바뀐 건, 2학년으로 진학하면 서다. IMF로 함께 운동하던 이들이 많이 휴학해야 했다. 가끔 선배들과 찾았던, 학교에서 멀지 않은 판자촌은 경제적으로 더욱 힘든 상황에 놓였다. 고등학생인데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 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구했다. 마음이 아팠다.
어느 날 밤, 선배들과의 술자리에 회의감이 들었다. 우리 구호는 왜 세상도 바꾸지 못하고, 기구한 고등학생의 삶도 바꾸지 못할까. 그러다 매일 들어가는 이 술값, 안주 값, 담배 값을 모으면 휴학한 친구들, 어려운 처지의 학생들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작지만, 눈앞의 상황은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술에 취해 선배들에게 물었다.
“우리 이렇게 취할 게 아니라 그들을 돕는 건 어때요? 술과 담배에 돈을 쓰지 않고 모으면, 우리가 변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몇몇 선배는 나를 나무랐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변화가 그 돈 몇 푼으로 이뤄지는 것이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내 생각은 너무 치기 어린, 순진한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그 순간 자존심이 상했지만, 존경하는 선배들이 틀렸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나를 질책했다. 스스로 부족한 생각을 했다고 자책했다.
그날 이후, 난 혼란을 겪었다. 내 생각과 선배들의 질책이 뒤섞여 짧은 대학 생활이 제공한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몇 주 후, 여름방학을 맞았다. 방학 동안 나는 술과 담배를 끊었다. 그리고 일용직으로 일해 돈을 벌었다. 처음으로 경험한 고된 노동은 너무 힘들었다. 술과 담배가 무척 생각났다.
하지만 나는 선배들이 말하는 치기 어리고 순진한 아이로 남고 싶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일용직 노동은 보름가량 밖에 하지 못했다. 난 정말 힘든 게 무엇인지 모르는 그냥 어린아이였다. 그래도 일용직과 끊은 술과 담배로 모은 돈을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에게 주었다. 그 친구는 어리둥절해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내내 울었다. 내 기억에 처음으로 진짜 어른이 되고 싶다 생각한 날이다. 그냥 어른들의 무엇을 따라 하며 흉내 내는 아이가 아닌, 자기 생각과 철학으로 살아가는 진짜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이후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다행히 22년째 금연 중이다.) 학보사는 그만두었고, 다시는 선배들과의 술자리에도 가지 않았다. 아직 아이 같은 행동일지 모른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아이로 남겨두려는 그 무언가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어쩌면 누군가의 생각을 맹목적으로 따르던 관계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한 그날, 난 처음으로 더는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notice
유유히유영은 유자까, 믹서, 멸종각 세 작가가 함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세 작가는 한 주에 하루, 시간을 정해놓고 같이 글쓰기를 합니다. 키워드 단편선에 이어, 함께 공감할 한 주제를 정해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더는 내가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입니다. 이번 글은 유명 작가를 꿈꾸지만, 글쓰기 자체에 만족한다고 말하는 속물, 유자까의 에세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