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아무르> 리뷰 by 믹서
놀란 표정으로 아내의 얼굴을 감싼 남자와 멍하니 남편을 바라보는 여자, 영화 <아무르>의 이 포스터만 봐도 숨이 막혔다. 영화의 줄거리는 잘 몰랐다. 검색해서 대강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포스터만 봐도 그냥 다 알 것 같았다. <아무르>의 포스터는 그런 의미에서 참 대단하고 훌륭하다. 포스터로부터 시작된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끌림은 오히려 영화를 외면하게 했다. 그러나 미루고 미루다 결국 보고 말았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 작품은 세 번째다. <히든>과 <퍼니 게임>, 그리고 <아무르>. 하네케 감독은 인간의 민낯을 비추는 영화를 만든다. 영화는 평범하게 흘러가다가 한 두 번 펀치를 날린다. 세 영화 모두, 보고 나면 뒤통수를 크게 얻어 맞은 느낌이 든다. 굳이 보고 싶지 않은 인간의 심연을 들춰내니 불편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부끄러워진다. 하네케 감독은 42년생이다. 그것이 내겐 영화 내용만큼이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담이지만, 언제까지 영상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내가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반신불수가 된 아내(안느)와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남편(조르주), 그 둘의 일상과 인생 황혼기에서의 고뇌가 스토리의 주를 이룬다. 엄청나게 충격적인 내용은 없었다. 마지막에 조르주가 안느를 안락사시키는 장면이 너무 갑자기 나와서 놀란 거 빼고는, 담담하게 보았다. 아마도 현실과 영화의 갭이 크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자식이 있지만, 결국 노년엔 부부만 남는 현실도 익숙했다.
영화에서 그리는 인간의 삶이란 '폭풍 속의 고요' 같다. 간단한 수술을 통해 곧 회복될 줄 알았던 안느는 수술 실패 확률 5% 안에 들어 오른쪽 몸이 마비됐다. 피아니스트로 평생을 우아하게 살아온 안느는 계속 우아하고 싶었을 테지만, 걷잡을 수 없이 스러져 가는 육체 앞에서는 우아함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 남편 도움 없이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내가 불구도 아니고. 당신 할 일이나 해' 라며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다.
노부부는 한동안 일상을 그대로 유지하는가 싶더니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안느는 자신의 젊었을 적 사진이 담긴 앨범을 보다가 ‘인생은 길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안느가 온전히 자신의 생각을 완벽한 문장으로 구사한 마지막 말이 됐다. 얼굴 한쪽이 마비가 되어 말을 잘 하지 못하기 시작하더니, 뇌에도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는지 그야말로 식물인간 같은 상황이 되었다. 읊조릴 수 있는 말은 '엄마'와 '아파' 뿐이었다.
결국 조르주는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자기도 따라 죽을 생각을 한 것 같다. 아내에게 입힐 검은 드레스를 고르고, 흰 꽃을 샀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거실에서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가 보니 일상을 회복한 안느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조르주에게 곧 외출할 거니까 구두를 미리 신으라는 말도 했다. 조르주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신고 안느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이 장면은 실제는 아니고 영화적 장치다. 영화 마지막에는, 조르주와 안느의 딸 에바가 부모가 살던 집에 와서 거실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끝난다. 다음 세대인 에바에게도 죽음은 다가올 테니, 조르주와 안느가 겪은 일은 에바의 인생에서도 비슷하게 발생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함을 지킨다는 게 가능하긴 할까. 노인이 되면 아기로 돌아간다고 한다. 아기일 때는 부모가 돌볼 수 있지만(부모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노년엔 부모도 없다. 자식이 있다고 해도 365일 부모 옆에 있을 수는 없다. 사회적 돌봄 시스템이 노인을 온전한 한 인격체로 봐 주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인간으로서 무력한 시기에는 생존 자체가 위험한 거란 생각이 든다. 아기일 때는 부모님 덕에 어찌어찌 살아 남아 독립할 수 있었지만, 노년에 내가 제대로 생존할 수 있을런지는 미지수인 것이다.
늙어 죽는 일은 인간 최대의 비극이다. 우리는 이걸 분명히 알고 있지만,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죽음이 나에게도 찾아온다는 걸 늘 생각하며 산다면 어떨까. 정말 모든 사람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산다면 지금 같은 세상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잘 죽는 게 복이니 그게 꿈이라고도 한다. 잘 죽는다는 건 어떤 걸까. 내 의지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일까. 즐겁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통없이 평온하게 죽으면 잘 죽는 것일까. 타인이 보기에 깔끔한 죽음일 뿐이다. 당사자에게는 어떤 죽음일지 우리는 모른다. 사실 죽음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다. 인간은 매 순간을 처음 대한다. 하물며 '죽음'이라는 대 사건을 생전 처음 맞이할 예정인 우리는 당연히 그것에 대해 모를 수밖에.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무섭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상을 믿으며 위안을 삼기도 하는 게 아닐까.
결국 죽을 인생,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곧 자신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것을 예상한 안느도 조르주에게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물론 조르주는 대답하지 못한다. 나 역시 그것에 대해 알고 싶어 최근에 산 책이 있다.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를 며칠째 읽고 있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묻고 세계의 지성 100인이 답했다고 하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철학자나 지식이 많은 사람들에게도 쉬운 문제는 아닌가 보다. 나라고 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답이 없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말이다. 그저 현실에 충실하며 살아갈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어떤 삶의 방식에 자신의 노고를 쏟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 p74
맞는 말이다.
영화 <아무르>는 우리에게 아무런 교훈을 남겨주지 않는다.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 것이다' 라든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메시지 자체가 없다. 그저 죽음을 앞둔 한 사람과 그 사람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줄 뿐이다. 그들은 갑자기 닥친 절망 앞에서 최선의 선택들을 했다. 같은 상황에서 조르주와 안느와 달리, 병원에 입원하고 치료를 받으며 수명을 연장하는 걸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안느처럼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노년에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누군가는 복이 있고, 누군가는 복이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모두 각자의 삶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을 하며 살았고, 더는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순간을 맞은 것 뿐이다. 아무도 타인의 죽음을 평가할 수 없다. 죽음이야말로 오롯이 자신만의 몫이지 않을까.
<아무르>가 아무 교훈을 남기지 않은 것처럼 이 글도 그러하다. 내 나름의 의견일 뿐이다. 내 삶에 충실하며, 후회를 줄이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한다. 40년 산 나는 아직까지 그렇다. <아무르>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먹먹하다. 아마 그 마음이 며칠은 더 갈 것 같다. 영화가 교훈은 남기지 않았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툭 던져 주었다. 간밤에 영화를 보고, 아침에 남편 Y에게 이 영화의 줄거리를 말하면서 울컥했다. 목이 메어서 말이 잘 안 나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