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월세 집에서 1년 버티다 by 믹서
2015년 말, 첫 직장이었던 방송국에서 퇴사했다. 미국 한인 언론사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서 미련 없이 회사를 나오게 됐다. 7년간 피디로 쉼없이 일하며 지쳤고, 부조리한 회사의 민낯에 정이 떨어진 상태이기도 했다. 미국행은 적절한 타이밍에 달콤한 제안이었던 것이다.
전직 기자인 남편 Y는 당시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었지만, 기자일 때 맘껏 활약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늘 안고 살았다. 미국에 가면 Y도 기자에 다시 도전해 볼 수 있고, 나는 기자라는 새로운 직업을 경험하며 뉴스 영상도 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두근거렸다.
반면, Y는 미국에 가는 것을 그리 탐탁스레 여기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하고 싶은 일이 많았던 그였다. 그런 Y를 겨우 설득해 미국행을 결정하고, 별내 전세 집을 내놓기까지 보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집은 내놓자마자 나갔다. 양가 부모님 집, 동생 집에 살림들을 나눠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짧은 기간 내에 그 큰일들을 어떻게 치러냈나 싶다. 아마 미국병에 단단히 걸렸던 듯하다.
일단 Y는 10년 전에 받아 둔 관광 비자로 입국할 계획이었다. 우리가 가게 될 언론사의 대표는 일이 급하니 기자가 빨리 와 주길 바란다고 했다. Y는 나보다 일찍 미국에 가서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우리가 일하기로 한 언론사에서 당장 취업 비자를 내 주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여, 급한대로 난 학생 비자를 받아야 했다. 강남에 있는 한 유학원에 비자 인터뷰 코칭과 어학원 등록 대행 비용을 지출했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비싼 어학원에 가야 비자가 수월하게 나온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전세 보증금을 야금야금 까먹은 것 말이다.
Y는 초반에 대표 집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따로 집을 구했다. 미국은 전세 제도가 없고 월세로 살 수밖에 없었는데, 보증금으로 두 달 치 월세만 내면 되었다. 문제는 그 월세가 한국에 비해 매우 비싸다는 것이었다. 한국보다 물가가 많이 높다는 걸 감안해도 단번에 납득하긴 어려운 금액이었다. 월세가 거의 한 사람의 월급 정도였으니 말이다. (근데 요새 서울 집값, 전월세 가격이 그 수준인 듯하다.)
Y가 어렵게 구한 집은 그나마 월세가 그 동네에서 저렴한 편에 속했다. 2층짜리 아파트였는데 우리 집은 1층이었다. 2층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아, 집주인이 월세를 깎아 주며 공사 소음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소음이 대수인가. 얼마라도 월세가 적은 게 더 중요했다.
한편, 나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비자를 받았고, Y가 떠난지 3개월 만에 뉴욕 공항에서 Y와 재회했다. 낯선 땅에서 혼자 집을 구하고 일하느라 살이 쪽 빠졌더라. 이제부터 함께 본격적으로 살림을 잘 꾸려보자 다짐하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주말마다 이케아 등 이곳저곳을 다니며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집을 채워나갔다. 사람은 확실히 적응의 동물이다. 길을 익히고 일상 생활을 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존 본능이었으리라. 집과 동네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우리가 살던 지역은 뉴욕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플러싱이라는 곳이었다. 우리 집은 매우 조용하고 치안도 괜찮은 동네에 있었다. 집 바로 앞에 기차역이 있어서 맨해튼 나갈 때 편리했다. 버스 정류장도 5분 거리에 있고, 기차역 근처에 24시간 마트도 있어서 장보기도 쉬웠다.
미국은 집에 세탁기를 두는 문화가 아니다. 우리 집 역시 세탁기를 놓을 수 없는 환경이어서, 보름에 한번 정도 빨래방을 다녔다. 미국에는 빨래방이 진짜 많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빨래방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5년 전만 해도 빨래방은 낯선 문화였다. 그래서 처음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빨래방을 바라봤다. 큰 가방에 빨래할 옷들을 넣고 동네를 활보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뉴욕의 하늘은 정말 끝내줬다. 빨래방 오고 가는 길에 간간히 동네 산책을 했는데, 파란 하늘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감상하곤 했다. 탈수를 맡겨 놓고 동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도 많았다. 아메리카노 한 잔 시켜 놓고 멍하니 카페에 오고 가는 사람들 구경을 했다. 뉴욕은 역시 뉴욕이라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갔다. 사람 구경하다 보면 한두 시간은 훌쩍 날아갔던 그때가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하다.
이렇게 쓰고 보니 뉴욕에서의 일상도 꽤 안온한 면이 있긴 했었구나 싶다. 뉴욕 생활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미국에서의 1년이 대부분 워낙 험난했기 때문인지, 위에서 쓴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게다. 인간의 삶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신나게 뉴욕 맨해튼 거리를 다니는 모습만 보면 ‘미국에서 사는 게 진짜 좋은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이미지일 뿐, 실제 생활은 기쁨보단 슬픔이 많았다.
높은 물가에 비해 턱없이 적은 급여는 우리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비자 유지를 위해 다닌 어학원과 비싼 월세 외에도 지출할 돈이 많았다. 교통비, 식비만 해도 한국보다 훨씬 비싸다. 병원비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해서 크게 아플까 봐 전전긍긍했다. 아토피가 심해져서 병원에 한번 간 적이 있었는데, 알고 지낸 한인 의사 분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병원비와 약값이 20만 원 정도 나왔다. 그 정도 진료면 한국에선 7,8천 원 대면 해결된다. 미국이 30배 정도 비싼 거다. 어쨌든 미국에서 일하고 월급 받으며 살았지만, 결국 원래 가지고 있던 돈까지 많이 없어졌다.
그래도 다행히 주변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 어딜 가나 중요한 건 사람이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사실 미국에서 우리 부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도 사람이었고, 우리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사람 때문이었다. 이 글에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없어서 아쉽지만, 지금에 와서 우릴 고통스럽게 한 사람에 대한 원망을 쓰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보단,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했던 한 부부에게 아낌없는 도움을 준 이웃에 대해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다.
미국에서 기자로 살면서 많은 한인들을 만났다. 대부분 취재원들이라, 이웃이 될 거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기꺼이 나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 때때로 언어가 부족한 우리에게 입이 되어 주었고, 병원비로 고민하던 나를 기어이 병원에 오게 해 저렴한 비용으로 치료해 주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척박한 미국 땅에서도 1년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런 이웃들이 베푼 사랑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집의 기쁨과 슬픔을 공유했던 이웃들이 그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