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집을 구하기까지
2016년 1월, 많은 사람의 우려 속에 뉴욕으로 향했다. 출발은 나 혼자 했다. 미국에 있는 언론사 대표가 속히 왔으면 좋겠다고 해, 10년 전 받아놓은 관광 비자로 먼저 출발했다. 아내는 비자가 없어,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다. 우리는 눈물의 이별을 나누었다. 한 번도 떨어져 보지 않았던 부부가 이별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미국 비자 무섭다는 말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이놈의 비자 문제는 미국으로 가기로 한 뒤 바로 떠오른 문제였다. 2~3년 전부터(2015년 기준) 미국 취업 비자가 4월 1일, 단 하루에 다 소진된다고 확인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대표에게 취업 이민으로 가는 방법이 가장 좋아 보인다고 알렸다. 미국에서 사람을 구하는 공고를 내고, 없을 경우 내 스폰서가 되는 조건이었다. 이 경우 빠르면 8개월 정도 걸렸다. 사장님은 당연히 거부했다.
"내 변호사가 그러는데, 자기를 통하면 100% 받을 수 있다고 했어. 여기서도 취업 비자를 얻을 수 있으니, 빨리 넘어오면 좋겠는데."
100%? 의심스러운 수치가 아닌가. 1년에 18만 개의 자리가 나는데 말이다. 몇 년 전부터 사람이 몰려서 취업 비자는 4월 1일 단 하루밖에 받지 않았다. 그 하루에 수십만 명이 지원하기 때문에 그마저도 뽑기 운이 좋아야 가능했다. 우선 뽑기에서 뽑히는 일도 운으로 되는데, 과연 100%가 가능할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수치였다.(나중에 쓰겠지만, 대표가 듣고 싶은 대로 들은 수치였다.)
아내는 실망하는 눈치였다. 미국에 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큰 낭패를 겪어야 했다. 회사에 이미 통보한 상태였고, 주변 사람에게도 알렸는데 못 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내 여행 비자가 생각났다. 당시, 전쟁이 나면 바로 미국으로 떠나라고 어머니가 신청한 비자였다. 내가 인터뷰 당일에 가지 않을까 봐, 동생과 어머니까지 함께 신청해 비자를 얻었다.
잊고 있었는데, 문득 떠올린 그 비자로 인해 나는 떠날 수 있었다. 내가 먼저 가서 집도 구해두고, 차도 구할 수 있으면 구하기로 했다.(미국에서 사는 1년 3개월 동안 차는 없었다.) 시카고에서 2시간 대기하고 뉴욕으로 향하는 델타항공을 탔다. 생각과 다르게 12시간 비행은 곤욕이었다. 도착하니 시카고는 아침이었다. 비행기도 2시간밖에 여유가 없어, 졸린 데 잘 수가 없었다.
난 입국 심사에서 잡혀 신나게 털렸다. 짧은 영어로 이것저것 설명하고, 뉴욕에서 지낼 주소를 적은 뒤에야 풀려났다. 입국 심사장에서 질질 시간을 끈 덕에 비행기 시간에 겨우 딱 맞출 수 있었다. 졸렸는데 참 다행한 일이 아닌가. 잠이 확 깼다. 미국의 첫인상은 무서운 나라였다.
뉴욕에 도착하니 대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데려가며 여러 설명을 해 주었다. 귀에는 대표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지만, 실망하고 있는 내 모습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맨해튼이 뉴욕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그냥 경기도 양평 같은 ‘퀸즈’라는 동네였다.(퀸즈도 뉴욕시에 포함된다.) 대표는 기차역에서 표를 끊어주며, 맨해튼 구경을 하고 오라고 했다. 첫날, 난 그렇게 덩그러니 혼자 놓였다.
대표가 서둘러 오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작은 한인 신문을 하고 있었는데, 기자가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것도 저 멀리 LA에 있었다. 처음 2주 동안은 대표 집에서 머물렀다. 스트레스는 물론 엄청 귀찮은 일이 많았다. 도착 후 며칠 지나지 않아 폭설이 내렸다. 집 마당의 눈을 홀로 치워야 했다. 게다가 대표의 아들이 학교로 돌아가는 날, 난 보스턴까지 동행해야 했다. 그렇게 갓 미국에 도착한 내게 운전까지 시켰다. 이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미국에서의 첫 순간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신기하게 저녁 8시만 되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말로만 듣던 시차 적응을 하는 기간이었다. 헤롱헤롱거리는 날이 많았다. 시차 적응이 그렇게 힘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약 2주일 동안은 저녁에 깨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기사를 써야 하는 일은 도착 3일 만에 시작됐다. 정말, 어떤 날은 졸린 눈을 뜨지 못해 잠드는 일도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몇 주 지나 하숙집을 구했다. 회사 사무실 바로 근처에 있는 집이었다. 걸어서 5분 거리였으니, 상당히 가까웠다. 점심도 하숙집에서 먹는 날이 1주에 3일 이상 있을 정도로 잘 이용했다. 하숙집에는 한인 약 8명 정도가 머무르고 있었다. 물론, 단 한 명과도 인사를 나누지는 못했다. 6주 만에 집을 구해 나왔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한인 한 명도 구경하지 못하고 나왔다.
그러던 중 아내가 3월 중순에 온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만세를 외쳤다. 다행히 맨해튼에 있는 비싼 어학원을 통해 학생 비자를 받았다. 당시에 여성에겐 비자 발급이 잘 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받을 수 있었다. (성매매의 가능성이 있어서 거절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몇몇 유학원에서는 나이가 많아 안 된다고 거부해서 아내가 걱정이 많았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이제 임시 숙소가 아니라 집을 구해야 했다.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약 10곳 정도 알아봤는데, 대표는 비싸다고 말했다. 내 월급이 2,000달러였는데, 월세가 내 월급보다 비쌌다. 한국에서 보통 받는 급여라고 생각했는데, 내 급여는 보통 낮은 것이 아니었다.(현실적으로 4,000달러는 되어야 생활이 가능하다.) 지하는 1,200달러에도 갈 수 있었으나, 우리 고양이들을 생각하면 안 될 말이었다. 가보기도 했는데 진짜 지하였다. 반지하도 아닌 그냥 지하 말이다.
다행히 마지막에 본 집을 계약했다. 월세가 1,900달러였는데, 주인이 그 아파트를 구입해 수리하는 중이라고 일 년 동안 1,700달러만 받겠다고 했다 (집이 4개 있는 아파트였는데, 3개를 집주인이 직접 수리했다). 다행히 위치는 좋았다. 대로에서 좀 멀었지만, 기차역 바로 앞이었다. 아내가 맨해튼에 있는 어학원까지 가기에 편할 것 같았다. 1층이라 도둑이 드는 건 아닌지 조금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집을 구할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미국은 브로커들의 천국이다. 이 계약으로 브로커에게 1~2달 치 월세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보증금은 2달 치 월세를 내고 들어가는데, 보통은 나오기 2달 전부터 월세를 내지 않고 깐다. 집주인이 돌려주지 않을까 걱정해서 그렇다. 하여튼 생각보다 큰돈이 들었다. 그렇게 집 계약을 하고, 덩그러니 5일을 혼자 지냈다. 기쁜 마음으로 아내가 오길 기다리면서.
잠시 아내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설렜지만, 어마어마한 투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급여를 제때 주지 않는 대표, 아내와 성격 차이 등 모두가 싸움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1년 3개월을 버텼다. 미국에서 힘들었던 것들도, 한국으로 돌아오니 다 추억이었나 보다. 1년 3개월을 지낸 뉴욕이 가끔 그리우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