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짐승

유정의 세계

by 김승예

유정은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앞만 보고 내달렸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숨이 목끝까지 차올랐을 때, 복도 왼편의 방 안에서 희끄무레한 윤의 형체가 스쳤다.
그냥 지나치려던 발걸음이 그 자리에 붙들렸다. 너무 세차게 달려온 탓에, 유정은 몇 걸음을 더 내딛고서야 몸을 멈출 수 있었다.
그녀는 지나쳐온 공간을 되짚듯 천천히 돌아섰다.

윤은 여느 때처럼 텅 빈 방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유정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낡은 나무판자가 삐걱이며 조용한 인기척을 알렸다.
윤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유정을 바라보았다.
유정은 인사 대신 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어, 내 동생 왔어? 오늘은 좀 일찍 왔네?”
윤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유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하루 동안의 사소한 일들을 재잘거리며 풀어냈겠지만, 오늘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윤은 그 낯빛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유정,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좀... 어둡다?”

유정은 고개를 살짝 젓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야. 그냥... 별일 없었어, 오빠.”

윤은 그 말이 얼버무림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별일 없다’는 말에 안도하며, 장난스럽게 웃어넘겼다.
“난 또, 네 얼굴 보고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 아니라고 하니까 다행이네. 너 인생에 큰일이라면... 엄마랑 아빠 만나러 갔다가 그 꼴 당한 것만 해도 남들 열 해 치르는 시련은 미리 겪은 거지.”

유정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림자 속에서 불현듯, 어울리지 않게 햇살 같은 웃음이 스쳤다.
윤을 바라보며, 그는 문득 생각했다.
아마 오늘의 일도 윤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게 윤에게 비밀을 만들 수 없다는 순수함 때문은 아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위로받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올랐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유정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어떤 말로 포장해도, 윤에게는 결국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오빠는... 나 없을 때 이 방에서 뭐 하면서 지내?”
유정은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살폈다.
아까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들이 혹시 들킨 건 아닐까 싶어, 얼른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싫어, 말 안 해줘.”
윤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웃었다. 어딘가 머쓱한 기색이 엿보였다.

“나는 맨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 얘기해주잖아. 근데 오빠는 내 말만 듣고, 자기 얘기는 안 해. 나도 오빠가 나 없는 동안 뭐 하는지 궁금하단 말이야. 말 안 해주면... 완전 불공정 거래야.”
유정은 장난스레 말했지만, 마음 한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우리 돌머리 동생, 웬일이냐? 학교에서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오늘 왜 이렇게 어리광이야?”
윤이 웃자, 유정은 괜히 시선을 돌리며 툴툴거렸다.

“에이, 말하기 싫으면 말지 뭐.”

유정의 토라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은 잠시 뜸을 들였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 없는 동안 뭘 하느냐고?”
그는 천천히, 마치 속을 꺼내 보이듯 말을 이어갔다.
“그건 대답할 수 없어. 네가 날 불러내지 않으면, 나도 존재하지 않거든.”

유정은 미처 숨도 쉬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는, 유정아... 너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어.
네가 와야만 이 방도, 나도 함께 생겨나.
그리고 네가 돌아가면... 난 다시,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사라져.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윤의 목소리가 방 안에 가볍게 번졌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공기가 묘하게 일렁였다.

“그래서 내가 늘 말했잖아.”
그가 유정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너고, 너는 나야. 내가 사라질까 봐 걱정하지 마.
네가 나를 잊지 않는 한,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어.
그러니까, 제발... 너도 나를 떠나지 마.
어떤 일이 있어도.”

말의 끝자락이 흔들렸다.
그는 유정의 질문에 이끌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끝내 고백하고 말았다.
방 안의 공기는 더없이 고요했으나, 그 고요가 두 사람 사이를 천천히 떨리게 했다.


그동안 유정에게 그는 비바람을 막아주는 단단한 요새 같은 존재였다.

변치 않을 것처럼, 무너질 일 없을 것처럼.

하지만 막상 베일이 벗겨지고 나니, 유정이 딛고 선 땅은 생각보다 쉽게 흔들릴 수 있는 모래였다.

윤이 자신의 존재가 유정의 시선과 기억 위에만 근근이 얹혀 있다는 사실은, 유정에게 예기치 못한 무게로 다가왔다.

그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던 그가, 그 시간 동안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은, 유정의 가슴을 서늘하게 적셨다.

말을 끝낸 윤의 얼굴에는, 그 고백을 입 밖에 내기까지 홀로 통과해 온 망설임과 고뇌의 자국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곧. 그가 걸어온 사유의 깊이를 헤아릴수록 유정의 마음은 조용히 슬픔에 젖어 들었다.

유정은 왈칵 쏟아질 듯한 설움을 억누르며, 조용히 윤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 등 위에 자신을 조심스레 포개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오빠는 항상 나와 함께 할 거야.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마.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늘을 안고 있었고, 오빠는 그 어둠 속에 사는 사람이지만... 그냥 우리, 서로만 바라보면서 이렇게 살자. 굽이치고 더러운 인생일지라도, 함께 웃는 순간 하나쯤 갖고 있다면, 그게 그렇게 나쁜 인생은 아니잖아.”

그러나 입 밖으로는 단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놓인 문제들은 그런 다정한 고백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마음의 여유를 모조리 앗아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유정은 깨닫기도 전에, 윤의 등 위로 아버지의 성난 등이 겹쳐 보이는 걸 느꼈다.
해가 저물고, 숲속에 홀로 남겨진 아이가 마주한 어둑한 산 능선처럼.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서서히, 그러나 날카롭게 밀려왔다.

조금 전까지 윤을 향해 품고 있던 애처로움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그의 형체는 어느새 숲 가장자리에서 길을 잃은 아이 앞에 나타난 검은 들짐승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순간, 유정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솟구쳤다.
약물이 혈관을 타고 퍼지듯, 눈앞의 짐승을 무참히 찢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번져갔다.
그것은 유정에게 너무도 이질적인 충동이었다.
감당할 면역조차 없는, 날것의 폭력이었다.

참을 수 없었다.
유정은 눈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 짐승을 향해 칼을 들이밀었다.
칼날이 살을 가르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뽑아내고, 또다시 내리꽂았다.

그 행위는 단순한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번 박힌 칼은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살점이 칼날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처럼, 끈적하게 매달려 있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생의 감각이 칼끝에서 손잡이를 지나 손바닥으로 스며들자, 유정은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감각은 살을 지닌 존재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세포 하나하나가 제각기 의미를 품고, 살려달라고 절규했다.
그 비명은 서로 다른 언어로 울려 퍼졌지만, 유정은 그 안에서 윤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이미 멈출 수 없었다.
광기의 율동에 올라탄 손은 기계처럼 칼을 찌르고, 뽑고, 또 찔렀다.
검은 털 사이를 헤집고 칼이 살을 파고들 때마다 핏방울은 허공에서 폭죽처럼 터졌다.
꽃잎처럼 흩날리던 피가 이내 선혈이 되어, 그녀의 얼굴 위로 낙하했다.

처음엔 죄책감을 자극하던 비명도, 언제부턴가 축제를 알리는 팡파르로 변했다.
믿기 어려운 그 전율 속에서 유정은 숨 한 번 고르지 못한 채 스무 번쯤 칼을 내리꽂았다.
피가 솟구치고 살점이 들러붙는 감각이 점점 둔해져 갈 무렵이었다.

비명만 내지르던 짐승이, 고요히 학살을 받아내던 그 금수가, 갑자기 유정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성한 검은 털 사이로 드러난 나무껍질빛의 눈동자.
세상 모든 침묵을 담고도 여전히 가득 찬 그 눈을, 유정은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칼을 든 손이 멈췄다.
그 눈동자 속에 비친 얼굴, 피와 눈물이 뒤섞인 자신의 얼굴을, 유정은 그제야 보았다.
그리고 알아보았다.
그것은 윤의 눈이었다.

윤의 육신은 피로 젖어 무너지고, 살은 축축한 가죽처럼 처졌지만, 그 눈동자만은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서늘하고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유정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손에서 빠져나온 칼은 마치 방금 전의 참혹을 잊은 듯, 위엄 없이 땅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검은 짐승은 어느새, 숨을 거둔 백조로 변해 있었다.

무결한 흰 깃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위로 굳은 피가 얼룩져 있었다.
눈부시게 하얀 날갯죽지와, 그에 대조되는 검붉은 혈흔이 만들어낸 장면은 차마 눈을 뗄 수 없는 황홀로 번졌다.

유정은 무릎을 꿇고, 흩어진 깃털을 조심스레 쓸어모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상처 위에 하나씩 덮어주었다.
그것이 작별의 인사인지, 죄의 고백인지 알 수 없었다.

일을 마친 유정은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윤의 눈이, 이 모든 상상을 들여다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뼛속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유정아! 유정아!”
복도를 따라 정신없이 달리는 유정의 등 뒤로 윤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그 부름은 애절하고 다급했지만, 유정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앞만 보고 달릴 뿐이었다.

숨이 끊어질 듯한 순간, 세상이 찢어지듯 뒤틀리며 시야가 새하얗게 부서졌다.

월, 금 연재
이전 08화학부모 상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