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윤의 세계로
그날 이후, 유정은 한동안 윤을 찾아가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윤은 유정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가족보다 가까운 존재, 세상의 흔들림을 막아주는 버팀목.
그가 가끔 “내가 너고, 너는 나야.”라고 말할 때면, 유정은 그저 친한 사이끼리 나누는 말로 넘겼다.
그러나 그 문장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순간, 모든 감정이 낯설게 변했다.
윤의 존재가 자신의 기억과 시선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은 너무 무거웠고, 그 뒤로는 애틋함조차 쉽게 꺼내지 못했다.
게다가 윤과 함께 있을 때, 몸의 제어권이 조금씩 흔들리는 감각은 유정을 불편하게 했다.
표정이나 손끝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순간들이 이어지면서, 자신이 자기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불안이 마음속을 천천히 잠식했다.
그 감각이 싫어, 유정은 윤을 외면했다.
하지만 윤을 찾지 않은 한 달 동안, 유정은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이 돌아가고 싶은 곳은 여전히 윤이 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 세계가 낯설더라도, 윤이 없는 현실의 공허함에 비하면 감당할 만했다. 윤이 없는 시간은 묘하게 비어 있었고, 그 비어 있음은 일상 곳곳을 파고들었다.
자신을 보호하겠다며 세워둔 울타리는 어느새 자신을 가두는 벽이 되었고, 유정은 현실에 붙잡히려 할수록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결국 보름쯤 지난 어느 날, 유정은 다시 그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잠시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발은 익숙한 길을 빠르게 되짚었다. 숨이 뜨겁게 몰려왔고, 허벅지는 금세 저릿해졌다. 눈물은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지만, 유정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달리면서 뺨을 타고 내려가는 물기를 혀끝으로 대충 훔쳐내며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 눈물엔 사과도, 두려움도, 다시 마주할 수 있다는 안도도 섞여 있었다.
짧은 순간 혀끝에 남은 그 맛이 사라질 때, 유정은 자신이 다시 윤의 세계로 기울어가고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양쪽에 방들이 빼곡이 들어선 복도를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 좌측 방에서 섬광이 짧게 번졌다.
어둠을 살짝 찢고 사라진 빛 뒤로, 낮게 웅크린 천둥 같은 소리가 뒤따랐다.
‘저기다. 오빠가 있는 곳.’
유정은 망설임도 없이 그 사실을 알아챘다.
문 가까이에 이르니 방문 틈으로 흐릿한 안개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눈물이 고여 흐린 줄 알았지만, 가까이 다가설수록 귓가에 가느다란 빗소리가 스며들었다. 안개는 생각보다 짙었고, 공기 중에는 눅눅하고 차가운 물 냄새가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방 안에 고여 있던 시간이 오래 썩어, 비로 변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유정은 뺨을 전부 적신 눈물을 손등으로 쓸어냈다.
한순간 시야가 닦이듯 맑아지며, 거기 윤의 모습이 천천히 떠올랐다.
하얀 트렁크 팬티 하나만 걸친 그는 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젖은 피부가 차갑게 빛나고 있었고, 겨드랑이 아래로 줄줄 흐르는 물방울이 갈비뼈 사이의 얇은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등은 유난히 앙상했다.
머리칼이 젖어 목덜미에 들러붙어 그 아래 척추의 마디가 한 개 한 개, 비에 젖어 떠오르는 글자처럼 또렷하게 드러났다. 몸을 지탱하는 마호가니 스툴은 삐걱거릴 듯 불안했고, 윤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아주 조용히 떨렸다. 그 떨림이 방 안의 비보다 더 작고 더 절박하게 느껴졌다.
유정은 결국 자신도 모르게 넋 나간 걸음으로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머릿속의 준비나 변명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들어올걸… 오빠의 얼굴 마주하면, 그간의 공백을 무슨 말로 채우지.’
잠깐 스쳐간 후회는 이미 닫힌 문 뒤로 밀려났다.
유정은 발목까지 차오른 얕은 고인물 속을 조심히 헤치며 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비에 녹아가는 듯한 윤의 등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온기가 거의 빠져나간 조개껍데기 같은 느낌이었다.
“오빠… 나 왔어. 오래 기다렸지.”
윤은 젖은 머리칼을 턱 아래쪽으로 떨어뜨린 채 한참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유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빗물에 잠긴 듯 번들거렸지만, 눈두덩이 벌겋게 부어 오른 것을 보고 유정은 그가 울었음을 알아차렸다.
“너… 왜 안 왔어. 넌… 나 없어도… 사는 데 괜찮은 거야?”
윤의 목소리는 뼈에 금이 가듯 가늘게 갈라져 있었지만, 유정의 귀에는 빗소리 사이로 스며드는 낮은 울음처럼 들렸다.
유정은 미리 준비했던 말들이 전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대답 대신, 한 달 동안 자신의 부재로 움푹 패인 윤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윤의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 하나가 이마를 타고 흘러 속눈썹 끝에 매달렸다. 그 작은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 힘으로 버티는 듯 흔들렸다.
윤은 그것이 성가셨는지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그리고 다시, 유정을 향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살아보니까… 괜찮았냐고 물었잖아.”
그제야 유정은 숨을 내쉰 뒤, 눌린 감정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들은 정리된 문장이 아니었다.
억눌려 있던 마음이 낱낱이 맨몸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뿐이었다.
“살만 했냐고...? 아니. 힘들었어. 진짜 힘들었어. 죽고 싶을 만큼... 그랬어. 정말이야.
오빠를 볼 수 없다면, 그냥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어. 나도 나름대로 오빠 보러 오고 싶었어. 근데 계속 보면... 더 의지하게 될 것 같았고, 그러다 나중에 오빠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진짜로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어. 결국 내가 살아야 하는 건 이 방이 아니잖아. 바깥이잖아.
오빠한테 기대면 기댈수록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랑 거리는 자꾸 멀어졌으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나를 이해 못 하잖아.
근데 이제 상관없어. 사람들이 뭐라 하든, 오빠를 못 보는 게 훨씬 괴로워. 뒷 일 생각 안 할래. 그냥... 오빠 곁에 있을게.
오빠가 말했잖아. 내가 오빠를 찾는 이상… 오빠는 계속 내 안에 있는 거라고, 맞지?”
그 말은 분명 윤에게 향했지만, 정작 유정의 가슴 속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고백이 아니라, 오래 묵혀둔 절망을 자기 목 끝까지 차올라 겨우 밀어 올린 듯한 울음에 가까웠다.
그동안 외면해 온 마음의 바닥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그 부끄럽고 원초적인 진실을 토해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정은 바랐다.
방 안을 채운 빗소리가 조금만 더 크게 울려서, 자신의 말이 물결에 휩쓸려 어딘가로 흐려져 버리기를. 윤이 단어의 결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의미의 날을 절반쯤 놓쳐 버리기를.
그 작은 바람은 너무나 간절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는 마침내 속삭이는 듯 잦아들었고, 윤의 얼굴은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밝아지고 있었다.
유정은 그 표정에서 자신이 내뱉은 모든 말과 그 안의 흔들림, 숨막힘까지, 온전히 윤에게 볕이 되어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읽어냈다.
그제야, 숨 한 줄기가 유정의 어깨에서 조용히 무너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