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이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학원을 전전하느라 분주했다.
시내 학원들 역시 ‘예비고 준비반’에서 ‘SKY 대비반’까지 각종 반을 쏟아내며, 좋은 대학을 원하는 학생들을 붙잡기 위해 애를 썼다.
학원에 다니기만 하면 잘하는 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 과정까지, 못해도 1학년 1학기 정도는 방학 동안 예습해둘 수 있었다.
이런 흐름은, 그 대열에 올라타지 않는 아이들이 곧 ‘도태되는 아이’라는 인식을 만들었다.
처음엔 관망하던 부모들도 점점 죄책감과 경쟁심에 잠식돼 결국 그 흐름에 편승했다.
‘우리 아이만 뒤처지면 어쩌나’ 하던 불안은 어느새 ‘우리 아이가 더 앞서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변했고, 그 결과 자녀를 학원에 보내는 일이 정규 교육과정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방학이 시작되기 무섭게 아이들은 학원으로 내몰렸고, 경쟁의 한가운데로 던져졌다.
몸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 어른의 형태를 닮아갔지만, 그 속도를 따라가기엔 마음은 턱없이 느렸다.
이 폭발할 듯한 부조화를, 아이들은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른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하루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강사들은 살아 있는 감정을 보듬기보다 죽은 활자를 주입하는 데 익숙했고, 부모들은 아침 잠깐 혹은 밤늦게야 겨우 얼굴을 비췄다. 마음속 깊이 응어리진 고민을 털어놓는다 해도, 이미 오래전 사춘기를 건너온 부모는 그 감정의 체온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자신들이 어릴 때 듣기 싫어했던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좋은 대학 가면 다 해결돼.”
순진한 아이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근본적인 고민은 밀어둔 채 학원으로 향했다.
정작 자신들이 부모의 시야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도, 대학 이후에도 또 다른 고역이 이어질지 모른다는 사실도, 그들은 알지 못한 채였다.
그럼에도 공부에 매달리는 동안 회의는 어김없이 틈새로 스며들었다.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마음을 흔들며 되묻는 목소리였다.
‘좋은 대학 가기 전까지, 지금의 나는 뭐지?’
어른들에게 외면당한 아이들은 학원과 독서실을 기계처럼 오가며, 같은 고민을 품은 또래에게서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기댄 채, 자신들을 압박하던 공간들을 역으로 ‘숨구멍’으로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과 독서실을 오가던 길목에서 마치 이끼 낀 산기슭을 거닐다 우연히 폭포 끝에 걸린 무지개를 발견하듯, 아이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랑에 빠졌다.
그 순간부터 그들이 붙들고 있던 존재론적 고민은 놀랄 만큼 가벼워졌다. 어른들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며 미루던 고민은, 눈앞의 사랑이 단번에 잠재운 듯 보였다.
아이들은 둔한 부모조차 눈치챌 만큼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전에는 작디작은 꿈을 놓칠까 두려워 베개 속으로 숨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잠에 매달리곤 했지만, 이제는 꿈보다 더 달콤한 현실이 그들을 깨웠다.
아침이 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거실을 서성거렸고, 배 안에서는 나비가 작고 간지러운 날갯짓을 해댔다.
설렘은 어느새 불면의 원인이 되어버렸지만, 모든 게 처음이었기에 그 뜨거운 심장을 다스릴 방법을 몰라 그저 발끝으로 초조함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독서실 계단에서는 시선들이 엉켜 붙었고, 마주치는 횟수는 곧 관심의 농도가 되었다.
학원 쉬는 시간에는 볼펜이나 수정테이프를 빌리려는 핑계로 말을 걸었고, 상대는 그 의도를 어렴풋이 감지하고는 쑥스럽게 미소를 섞었다.
학원 버스를 타고 밤 9시 즈음 집 앞에 내려도, 아이들은 피곤함을 잊은 채 여전히 서로에게 이끌렸다.
상가의 작은 벤치에서, 한겨울 바람에 텅 빈 운동장의 그네에서, 혹은 공원 한쪽에서, 두 사람은 집요하게 빽빽한 시간표 사이로 둘만의 틈을 만들어냈다. 그네에 나란히 앉아 차가운 쇠줄에 손을 얼리다가 바람이 더 날카롭게 몰려오면 학교 건물 뒤로 자리를 옮겼다.
밤 9시가 훌쩍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엄마의 전화가 울렸고, 부모가 학원에 항의하자 학원에서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풋사랑은 그 어떤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다소 잦아들면 소년은 아까부터 목 뒤를 간질이던 말을 마침내 꺼냈다.
“…사랑해.”
달빛을 머금은 소녀의 눈동자가, 아주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떨렸다.
집으로 가는 길, 유난히 별이 많아 보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운동장에서는 두어 개만 보이던 별이, 지금은 머리 위로 쏟아질 듯 빼곡히 박혀 있었다.
그날 밤, 소년과 소녀는 각자의 방에서 서로가 되어, 자신이 어떻게 보였을지를 곱씹으며 천천히 시간을 건너갔다. 그날의 기억은 잘 녹지 않는 사탕처럼 입안에 오래 남아 있었고, 밤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하지만 단맛에 익숙해질 즈음, 그 틈을 비집고 다른 감정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언젠가 칠흑 같은 밤하늘이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어, 서로를 갈라놓고 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사랑은… 원래 이렇게 고통도 따라오는 걸까?’
주체할 수 없는 불안한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아이들은 차라리 아침을 재촉하기로 마음먹었다.
온몸의 힘을 빼고 눈을 감자, 매일 밤 어깨를 짓누르던 과제와 성적표는 그날만큼은 멀리 밀려났다.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단 하나.
다음 날 다시 그 아이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이었다.
시간이 지나 몸이 따뜻해지고, 총기를 잃은 눈이 조금씩 잠겼다. 그렇게 아이들은, 서로를 생각하며 긴 밤을 조용히 건너갔다.
하지만 또래들이 겪는 것과 다르게, 유정의 방학만은 묘하게 비어 있었다.
윤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던 그녀는 또래들 사이에서 점점 어긋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방학이 되어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줄어든 탓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유정은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아이였고, 특히 이성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학원도, 독서실도, 또래들이 자연스럽게 드나드는 공간 대부분이, 유정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세계였다.
마트에서 일하는 엄마의 벌이로는 그저 둘이 먹고사는 게 빠듯했고, 설렘을 좇는 일은 애초에 사치였다.
남들이 학원에서 10개년 기출과 족보를 ‘먹여주듯’ 받아보는 동안, 유정은 자습서를 들고 혼자 길을 찾아야 했다. 구청에서 제공하는 저렴한 인터넷 강의가 그녀에게 허락된 거의 유일한 도움의 손길이었다.
서점에 들러 문제집을 하나하나 비교해 고르는 일은 지겨웠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원룸형 빌라에서 주공아파트로 옮기며 처음으로 자기 방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밤이 깊어 창문을 닫아도 바람이 스며들면, 책상에 앉은 유정의 손끝은 펜을 쥔 채 서서히 얼어붙었다. 화장실에 갈 때와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면 8시간 넘게 같은 의자에 앉아 있어 엉덩이는 금세 눌리고 저렸다.
얇은 쿠션은 금방 납작해져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결국 유정은 책상에서 물러나 침대에 엎드려 개념서를 펼쳤다.
팔꿈치를 괴고 읽다 보면 금방 저려와, 두 팔을 번갈아 주무르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잠이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듯 스르르 내려앉았다.
‘내일은 꼭 방석을 사야지.’
그 다짐은 늘 그렇듯 새벽의 졸음 속에 가라앉았다.
민선은 유정이 새벽까지 공부하다 깜빡 잠든 사실을 몰랐다.
아침에 출근하기 전, 불을 켠 채 엎드린 딸을 보면 어김없이 말했다.
“돈을 안 벌어봐서 전기요금 무서운 줄을 몰라서 그래.”
자는 도중에 깨어나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한 유정은 책상에 앉자마자 눈꺼풀이 곧장 무거워졌고, 공부는 시작도 하기 전에 졸음과 싸우며 흐트러졌다.
그러다 보니 방석 하나 사러 나갈 여유조차 생기지 않았다.
한두 시간만 내면 될 일인데도, 그 시간만큼 진도가 밀릴까 봐 다시 ‘내일’을 미뤘다. 그래서 또 엉덩이는 아파오고, 결국 침대로 옮겨 누워 책을 펼치다가 단 한 줄도 제대로 새기지 못한 채 잠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오고, 민선의 꾸지람이 이어졌다.
유정의 방학은 그렇게 흘러갔다.
특별한 날 하나 없이, 피로와 무기력과 잦은 꾸중이 조용히 반복되는 날들만이 꼬리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