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開化)

유정의 발견

by 김승예

금요일 아침, 유정은 평소처럼 출근하는 엄마를 현관 앞까지 배웅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뉘었다.

깊은 잠에 빠졌다 다시 깨어난 건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베란다로 나가보니, 밤새 얼어붙은 공기가 어젯밤에 널어둔 빨래를 단단히 굳혀 놓았다. 유정은 팔을 벌려 건조대 위의 빨래를 한가득 끌어안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날의 첫 일은 수건을 개는 것이었다. 카라나 소매가 달린 옷보다 수건은 훨씬 다루기 수월했다. 각을 맞춰 접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유정은 수건의 모서리를 양손으로 들어 식탁보처럼 탁-하고 펼쳤다. 그 순간,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콧등을 간질이며 기분 좋은 여운을 남겼다.

수건을 접고 나서는 옷과 바지, 양말을 차례로 정리해 각자의 서랍에 가지런히 넣었다.

모양을 맞춰 접고, 자리에 맞춰 넣는, 뚜렷한 규칙이 있는 일은 유정에게 언제나 안도감을 주었다.


부엌으로 향하자, 아침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싱크대 위에는 밥풀이 덕지덕지 붙은 밥그릇과 숟가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원목 식탁 위에는 뚜껑이 열린 반찬 통 속 미역 줄기와 깻잎장아찌가 정오의 건조한 공기 속에 수분을 잃고 있었다. 식탁 한가운데, 파란 실리콘 받침대 위에 올려진 검은 뚝배기 안에는, 아침에 엄마가 떠먹고 간 된장찌개가 이미 식어 있었다.

유정은 약간의 양파와 팽이버섯이 가라앉은 그 찌개에 물은 약간 부어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그사이 화장실로 가서 세안을 마치고 나오자, 부엌에서는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으며 뚜껑을 들썩였다.

유정은 부리나케 달려가 뚜껑을 열어젖히고는, 하루의 첫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엄마가 남기고 간 그릇과 자신이 막 비운 밥그릇을 함께 씻었다.

싱크대 위로 난 작은 창 너머로 햇빛이 들이쳐 하얀 사기그릇이 반사됐다. 순간 눈이 부셨지만, 그와 함께 스며든 바깥바람은 한기가 서려 있음에도 어쩐지 기분 좋게 상쾌했다.

유정은 그 바람에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물을 잠그고, 물기를 털어낸 손을 앞치마에 닦고 나니 문득 조용한 집 안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할 일을 끝내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땐 어느새 오후 세 시가 넘어있었다.

‘벌써 하루의 절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네.’

괜한 초조함에 유정은 부스럭거리며 책장을 펼쳤다.

묵직한 정적 속에서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늦게나마 시작된 하루는 그렇게 조용히, 하지만 단단히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유정은 창밖이 어느새 어둑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책 위 문장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귀끝을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소리에 정신이 또렷해졌다. 현관 도어락이 눌리는 소리였다.
평소라면 짧고 경쾌하게 이어지는 숫자들의 고유한 리듬이 있었지만, 오늘은 어딘가 미세하게 맞지 않았다.
숫자판 위를 스치는 손가락이 잠깐 멈칫하는 기척.
그 공백에 검은 액체처럼 번지는 술기운 섞인 말소리. 하지만 문 너머에 막혀 울리는 그 흐릿한 울림만으로는 유정이 그 변화를 선명히 잡아낼 수 없었다.

책의 마지막 문장을 표시한 뒤 유정은 의자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두 번이나 틀린 뒤에서야 비로소 문이 열렸고, 유정은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 안으로 들어선 민선의 얼굴에는 고된 하루를 끝낸 사람의 피로 대신, 힘이 빠진 웃음이 넉넉히 번져 있었다. 현관 조명 아래서도 희미하게 비치는 붉은 기운이 그녀의 뺨에 오래 머물렀다. 유정은 한 박자 늦게 밀려온 냄새로 그 이유를 알았다.
익숙한 집 냄새와 충돌하며 확 퍼지는 술향. 코끝에 얼얼하게 파고드는 알싸함. 그 냄새만으로도 내일 아침의 민선을 대신 눈앞에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진했다.

“오셨어요.”
짧게 인사를 건넨 후, 유정은 얼른 방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취기가 오른 엄마와 마주 앉아 있다가 언제 어디서 화살이 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선은 문가를 가리키듯 손을 내밀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요. 괜찮아.”

유정은 문밖에서 울리는 인기척에 몸이 굳었다.
그동안 이 집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고는 은숙 이모뿐이었고, 그것조차 여러 번의 사전 예고 끝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엄마가 먼저 손님을 데려왔다.
그 말은, 유정이 모르는 누군가와 엄마가 이미 꽤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엄마의 좁은 등 뒤로 낯선 그림자가 길게 기울었다.
뒤따라 들어온 남자는 유정의 눈높이를 훌쩍 넘어, 현관의 낮은 조명을 머리 위로 밀어 올릴 만큼 컸다. 외투는 단추가 하나도 잠겨 있지 않았고, 그 아래로 드러난 배는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천천히 움직였다. 입가에 걸려 있는 누런 치아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눌어붙은 듯했고, 가까운 거리에서 새어 나오는 가쁜 숨은 그 부피만큼 공기를 눌렀다.

유정은 문득, 저 치아로 저녁을 씹어냈을 음식의 잔향이 아직도 그의 위 속에서 남아 있을 것 같은 상상에 약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남자는 외투에 밴 숯불 갈비 냄새를 현관 안까지 끌고 들어왔다. 이미 반쯤 집 안에 들어서 있으면서도 어색한 질문을 떨구듯 중얼거렸다.
“정말 들어가도 돼?”

민선은 그런 태도가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디서 이런 귀여운 눈치를 배워왔냐는 듯, 남자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 끌었다.
“종석 씨, 주저할 거 없어. 들어와.”

말끝이 채 마르기도 전에, 거실의 공기가 새로운 체온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유정은 아직 인사를 건네지 못한 채, 몸보다 먼저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시선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손님에게 당연히 갖춰야 할 예의를 떠올리기도 전에, 이미 마음속에서는 비호감이 먼저 형체를 잡고 있었다.

먼저 말을 건 쪽은 종석이었다.
“네가 유정이니? 엄마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반갑네.”
“안녕하세요.”

종석은 가장자리가 구겨져서 너덜거리는 가죽 구두를 현관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는 미적대지 않고 거실로 들어섰다.
민선이 안방으로 향하자, 그는 그 틈에 말을 하나 더 붙였다.
“예쁘게 생겼네.”

누런 이를 드러낸 웃음이 현관의 빛을 받아 젖은 살결 위로 번졌다.
술기운으로 부은 얼굴은 갈비 기름이 스민 것처럼 번들거렸고, 그 반사는 오히려 그의 주름을 더 깊게 세워놓았다.
유정은 처음엔 그 모든 것이 그저 천박하고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한데 그 인상은, 금이 가기까지 단 몇 초면 충분했다.

예고 없이 어깨에 얹힌 손. 그 감촉이 유정의 등뼈를 따라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기였으나, 온도와 상관없이 뼛속으로 가라앉는 위협의 결을 품고 있었다.
유정의 몸은 움츠러들려다 도리어 굳어 버렸다. 움직이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다리가 갑작스레 무게를 잃은 듯, 누군가 낯선 끈으로 사지를 죄어 고정해놓은 느낌에 가까웠다.

그러다 안방에서 민선이 종석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그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졌다.
유정은 숨을 들이마실 틈도 없이 안도의 파문을 느꼈다.

하지만 종석의 손은 금방 배반했다.
어깨에서 멀어진 그 손바닥이 유정의 등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한 번은 문질러 확인하는 듯한 움직임. 또 한 번은 무언가를 찾다 놓치는 듯한 동작. 그리고 마지막으로, 체온만 스쳐 남긴 채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 손이 떨어져 나가고서야, 몸에 걸린 힘줄이 늦게 풀리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현관 한가운데에는 종석의 구두 한 짝이 유정의 신발 위에 덮여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신발의 겹침은 방금 전의 감각처럼 어딘가 비틀려 보였다.

유정은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며,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러고는 발끝으로 조용히 그 구두를 밀어내고, 아무 말 없이 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신의 방문을 열다 말고 뒤를 돌아본 순간, 유정의 시선은 문틈 너머로 흘러나온 장면에 붙들렸다.
엄마가 종석의 팔 안쪽에 반쯤 기대어 있었다.
민선의 표정은 피로와 함께 녹아내린 듯 부드럽게 풀려 있었고, 종석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천천히 쓸었다. 가볍게 어루만지는 동작이었지만, 그 속엔 이미 방금 전 유정의 피부를 건드렸던 감각과 이어지는 무언가가 분명히 숨어 있었다.

유정의 숨이 서늘하게 멎었다.
처음엔 그저 우연이겠거니, 의미 없는 스침이었을 거라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되살아난 그 촉감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손끝이 어디를 지나갔는지, 어느 지점에서 멈칫했는지, 그 작은 맥락 하나하나가 비현실적으로 또렷했다. 그건 단순한 실수로 포장될 수 있는 종류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유정은 그나마 자신이 속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억지로 위안을 구했다. 그러나 그 위안은 물 위에 던진 돌처럼 곧바로 가라앉았다. 감정은 진정되기는커녕 더 독하게 일렁였다. 몸속 어딘가에 차가운 생물이 둥지를 튼 듯한 느낌이 퍼졌다. 뱀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몸을 감아오르는 듯한 꺼림직한 기척이 등과 목덜미를 따라 기어올랐다.
손길은 분명 사라졌는데, 감각만은 지독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피부 아래 잔영처럼 들러붙어 쉽게 지워질 기미가 없었다.

유정은 문고리를 다시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 작은 금속의 차가움조차도, 방금 전 스며든 감각을 밀어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낯선 엄마의 웃음소리가 종석의 웃음과 뒤섞여 유정의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문틈을 타고 스쳐 들어오는 그 소리는 얇은 장판을 밟는 발자국처럼 유정의 마음 한가운데를 짓눌렀다.

유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늘 원칙을 앞세우고, 단호함을 생존법처럼 지켜온 엄마가 왜 한 남자 앞에서는 이런 식으로 무력해지는지. 피를 나눈 형제보다, 세월을 견디며 곁을 지켜준 은숙 이모보다, 왜 딸을 음흉하게 훑어보는 낯선 남자가 그 자리에서 더 빠르게 신뢰를 얻는지. 그 남자가 엄마에게 준 것이 대체 무엇일까. 말, 약속, 온기, 혹은 더 비루한 어떤 것. 그것들이 어떻게 몇 년의 관계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낯선 이에게 곁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인지.
유정은 답을 모른 채 확신만 얻었다.
만약 그 남자가 유정에게 어떤 해를 끼쳐도, 엄마는 그를 두둔할 것이고, 그 책임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올 거라고. 이 집에서의 규칙은 항상 그랬다. 바뀌지 않을 구조는 오래된 식탁의 흠집처럼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밖에서는 웃음이 점점 크게, 또 다른 무언가로 변해갔다. 싸락눈이 젖어 무너지듯, 가벼웠던 기척은 곧 점점 더 습하고 무거운 소리가 되었다.
유정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가득해 귀에서 미끄러졌고, 아무리 눌러도 소리는 틈을 찾아 들어왔다.막히지 않는 물처럼 스며들어 이제는 귀가 아니라 가슴속을 적시는 느낌이었다.

유정의 몸을 스쳤던 그 손이, 지금은 엄마의 몸 위 어디쯤을 헤매고 있을 거란 사실이 뼛속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방금 전 자신에게 닿았던 그 의도적인 움직임이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상상이란 말조차 무색할 정도로 현실에 가까웠다. 그때마다 민선의 숨소리는 더 깊어졌고, 그 소리는 유정에게서 무언가를 하나씩 뽑아내는 기계처럼 들렸다.
더는 인간적인 정서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저 유정의 자리를 밀어낼 뿐인 소리였다.


유정은 손가락 끝이 저릴 만큼 귀를 막은 채, 자신을 다른 장면으로 옮기려 애썼다.
윤.
그의 얼굴, 목소리, 손끝. 하지만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실루엣처럼 뭉개졌다.
집 안을 꽉 채운 음습한 기척이 모든 장면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종석의 존재와, 엄마의 기이하게 변한 숨소리가 이 집의 공기를 지배하는 한, 유정은 어디에도 도망칠 수 없었다.
닫힌 문 안에서도,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틀어막은 두 손 안에서도, 그 사실만은 잔혹하게 명확했다.



유정은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덮었다. 방금까지 부들부들 떨던 손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손을 팬티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곳은 세상의 탐욕과 광기, 불순한 사건과 단절된, 오직 자신만의 온기가 깃든 피난처 같았다.

차디찬 손끝이 속 살의 온도에 스며들어 점차 인간다운 감각을 되찾기 시작했다. 팬티 속은 외부 세계와의 마지막 경계를 지키고 있었고, 그 속에서 유정은 일종의 안도감과 환상을 느꼈다. 마치 어딘가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것 같았다,

손끝이 음부에서 엉덩이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며, 마치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조심스레 감각의 틈을 탐색했다.

그러던 중, 어느 지점에서 손끝이 멈칫했다.

몸의 구조적 비밀이 고요한 저항으로 드러났고, 유정은 그것이 항문도 요도도 아닌, 자신도 잘 모르는 어떤 ‘내부’임을 직감했다. 16년 동안 어렴풋이 가려져 있던 신체의 비밀 앞에서, 몸은 그제야 스스로를 인식하는 듯 낯선 기운으로 곧추섰다.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적인 지식은 너무 건조했고, 실제 삶과는 유리된 문장처럼 오래전 기억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마른 지식의 조각들이, 엄마의 신음과 함께 물처럼 차오르며 유정 자신의 중심을 꿰뚫고 있었다.

이 안에서 생명이 태어난다는 사실은, 유정에게 한동안 이해되지 않는 진실이었다. 오랫동안 그 부위를 ‘금기’로만 배워왔던 탓이다.

그곳에 어떤 감각이 있는지조차 느껴보지 못한 채, 단지 피해야 할 대상처럼 여겨왔다. 그런데 지금, 모든 감각이 거기에 쏠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신음, 억눌린 절규, 그리고 감추려 했던 불행과 쾌락의 잔재들.

유정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몸을 통해 이해해 보고 싶었다.


유정은 움직이지 않은 채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뱀처럼 몸에 감겨 있던 긴장과 불쾌의 잔재가, 온기와 촉감 사이에서 서서히 풀려나갔다.

다른 날 같았으면 그저 출산을 위해 여자가 하나 더 갖고 태어난 구멍이라며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울부짖음 속에 섞인 어떤 열망, 어떤 체념은 유정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엄마가 견뎌온 삶의 무게가, 혹은 종석에게 조각조각 내어준 그 몸이, 그곳에 진실처럼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정은 손끝으로 그곳을 더듬으며, 곧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처럼 더 깊이 침잠했다.

그 안은 마치 혀로 핥는 입 안쪽 같았고, 닿는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무게로 자신을 감쌌다.

이 낯선 포근함 속에서 유정은 어쩌면 엄마가 감추었던 욕망과 고통을, 생존의 흔적들을 읽어내려 했다. 남자들이 그곳을 원하는 이유, 엄마가 버텨낸 세월, 그리고 여자로 살아간다는 일의 잔인한 아름다움이 그 안에 압축되어있는 듯했다.

유정은 느꼈다. 언젠가 자신도 그 길을 지나게 될 거라면, 스스로 열어보고, 만져보고, 결정하는 방식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건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엄마의 선택을 용서하며,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상처를 미리 만져보려는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반쯤 감긴 시야 너머로, 음악 수행평가에서 사용했던 단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유정은 그것을 들어 올렸다. 이질적인 중량감이 손에 전해졌다.

무심코 불던 그것이 지금은 무언가를 상징하는 듯해 손끝이 떨렸다.

유정은 조심스럽게 몸을 눕히며, 처음으로 금기를 넘어보고자 했다.

처음에는 단단한 벽에 부딪히는 듯해서 내장이 꼬이는 듯한 낯선 통증이 밀려왔다.

유정은 잠시 숨을 멈췄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통증 뒤에 무언가 본질적인 감각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몸의 각도를 살짝 조절하자, 긴 관이 마치 길을 찾은 듯, 미끄러지듯 안으로 스며들었다.

단소가 더는 들어가지 않을 만큼 깊숙이 파고들자, 유정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손끝에서 시작된 낯선 자극은 마치 중심을 꿰뚫듯 퍼져나갔다.

무의식 중에 출입을 반복할수록 복합적인 감정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부끄러움과 궁금증, 죄의식과 해방이 한데 뒤섞인 눈물이, 상기된 뺨 위로 조용히 흘렀다.

절정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직감한 순간, 유정은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혹시, 윤이 이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당황한 유정은 무언가에 쫓기듯 몸을 일으켜 단소를 빼냈고, 그것을 바닥에 내던졌다.

바닥에 굴러가는 단소 끝엔,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지나간 흔적이 붉게 맺혀 있었다.


그날 밤, 유정은 두 겹의 죄책감 속에서 뒤척였다.
하나는 윤에게 차마 털어놓을 수 없는 그림자가 하나 더 생겨버렸다는 것, 또 하나는 그 그림자를 만들어 낸 손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가장 깊이 흔든 것은 그 어떤 비밀도, 위반도 아니었다.
엄마의 욕망을 이해해버린 자신이었다.
언제나 ‘저렇게는 살지 않겠다’고 속으로 수없이 맹세해 왔건만, 엄마의 신음 한 줄기, 몸속에서 들끓듯 솟구치던 감각 한 줄기가 유정의 내부를 열고 들어와 아니라고 외치던 자리를 비집고 앉았다.

그것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었다.
이해라는 말로도 어딘가 부족했다.
엄마가 쥐고 살아온 어떤 무게, 어떤 굶주림, 어떤 체념이 유정의 몸 안에서 형체를 얻듯 떠다녔다. 그 형체가 너무 생생해서, 유정은 자신이 엄마의 내장을 베껴 그려놓은 사본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미 반쯤 저 길에 서 있는 걸까?’


불 꺼진 방 안에서,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이불 위를 서늘하게 스친다.
유정은 그 희미한 빛에 손등을 비춰보았다.
손금 사이에 아직 남아 있을 것만 같은 따뜻한 잔향이 마치 타인의 숨결처럼 느껴져 소스라치게 손을 움츠렸다.

그제야 진짜 두려움이 찾아왔다.
엄마를 미워하는 감정과 엄마를 닮아가는 몸의 충동이 하나의 실로 이어져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그 실을 당기면, 두 감정이 동시에 울렸고, 놓아버리면, 두 감정이 함께 가라앉았다.

유정은 베개를 끌어안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감긴 눈꺼풀 뒤에서는, 엄마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이 겹쳐졌다 떼어졌다를 반복했다.그 반복은 꿈도 현실도 아닌 채로, 유정의 의식을 얇게 깎아내렸다.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죄책감은 점점 모양을 바꾸어 마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무언가처럼 서늘한 정적을 남겼다.
유정은 알고 있었다.
내일 아침,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학교에 가겠지만 자신의 몸은 이미 어젯밤의 잔해를 품은 채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이, 그 어떤 부끄러움이나 비밀보다도 더 견딜 수 없는 진실 같았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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