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석의 시선
시커먼 넝쿨에 잠식된 폐허 같던 민선의 나날은, 종석이라는 지붕 아래에서 해변의 별장처럼 환히 열렸다. 빛은 갑작스러웠고, 민선은 그 밝음에 자신이 얼마나 오래 어둠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뒤늦게 실감했다.
수입의 상당 부분을 옷과 화장품에 쓰기 시작했고, 텅 빈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밤도 눈에 띄게 줄었다. 거울 앞에 서는 시간이 늘었고, 얼굴에는 오랜만에 ‘돌보고 싶은 표정’이 돌아왔다.
길을 잃고 헤매던 민선에게 종석의 품은, 어떤 죄인이 숨어들어도 벌받지 않는 성역 같았다.
그곳에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변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민선은 그 안에서 세상의 책임을 잠시 내려놓고, 끝없이 어리광을 부리며 묵은 한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녀가 아이처럼 무너질수록, 유정에게 허락된 아이다움은 소리 없이, 그러나 정확하게 깎여 나가고 있었다.
민선이 집을 비우는 날이 잦아질수록, 유정은 집 안의 빈자리를 대신 채웠다.
학업과 집안일을 병행하는 일은 분명 벅찼지만, 엄마가 종석을 만나 잠시라도 웃을 수 있다면 그 정도의 수고쯤은 견뎌야 한다고 유정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것이 딸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그렇게 믿으려 애썼다.
늦은 저녁이 되면 유정은 집 앞 복도를 스쳐 가는 발소리에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날렵한 엄마의 구두 소리와, 바닥을 질질 끄는 종석의 둔탁한 발걸음이 겹쳐 들릴 때면 유정의 등에는 이유 없는 오한이 스쳤다.
종석이 말을 건네기도 전에 고개를 숙여 인사만 남긴 채 방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유정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안전한 동선이었다.
거실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밤이면 유정은 화장실조차 가지 않았다. 참지 못해 문을 열어야 할 때에도, 발끝에 온 신경을 모아 인기척을 지웠다.
엄마를 응원하기 위해, 유정은 종석을 견뎌야 했다. 그게 사랑이고, 이 집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으려 애썼다.
유정이 민선의 변화를 먼저 알아보았듯, 연애에 깊이 잠겨 있던 민선이 유정의 변화를 감지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연애 초반의 장막이 서서히 걷히고, 관계가 일상이 되어가던 어느 날, 평소처럼 종석을 데리고 집에 들어섰을 때였다.
문을 열자 유정이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엄마, 다녀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아저씨.”
짧은 인사였다. 낯빛은 어두웠고, 눈동자는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유정이 종석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쯤은 민선도 알고 있었다.
딸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순간, 민선은 느꼈다. 자신의 시야 너머에서, 종석의 시선이 유정의 뒷모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그 시선은 단순한 훔쳐봄과는 달랐다. 마치 등을 따라 한 겹씩 벗겨내듯, 느릿하고 집요했다.
공기 속에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가 스며들었고, 서늘한 감각이 민선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온몸으로 퍼졌다.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다는 예감. 그것은 상처 입어본 여자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오래된 감각이었다.
종석을 만나며 민선은 잠시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유정을 바라보던 종석의 눈빛을 읽는 순간, 그 믿음은 모래성처럼 속절없이 무너졌다.
민선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남자의 마음이 정말 나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유정과 닮은 형상에 잠시 기대어 있는 것인지. 사랑이 아닌 대체라는 의심은, 숨 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을 조였다.
민선의 질투는 늘 자신을 속인 남자보다, 그 곁에 선 여자를 향해 왔다.
잘못이 없는 상대에게 쏟아지는 원망은, 사랑받지 못한 자신의 분노를 가리기 위한 위장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종석의 시선이 향한 곳은 분명히 딸이었다.
민선은 그 찰나에, 오래전 자신에게서 연인을 빼앗아갔던 여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질투와 수치, 경계와 치욕이 한꺼번에 밀려들었고, 그 감정들이 딸을 향해 쏟아지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종석이 돌아간 뒤 민선은 문틈에 기대 서 있는 유정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눈앞에 떠오른 것은 자라나는 딸의 현재가 아니라, 자신이 흘려보낸 시간의 잔상이었다.
한때 거울 속에서 또렷하게 빛나던 곡선들.
그것들이 이제는 다른 몸 위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민선의 가슴을 조용히 옥죄었다.
그 시선은, 한때 같은 무대에 섰던 배우가 이제는 객석에서 후배의 연기를 바라보는 불안과 닮아 있었다.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예감. 시간 앞에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서늘함이었다.
민선은 자신도 모르게 유정의 결점을 찾고 있었다.
어디선가 흠을 발견할 수 있다면, 무너져 가는 자신의 마음을 붙들 수 있을 것처럼.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소한 결함이 아니라 아직 삶의 그림자가 닿지 않은 탄력과 빛이었다. 그 대비는 민선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유정은 민선의 실패와 성공, 투쟁과 회피가 응축된 또 하나의 인생처럼 보였다. 아직 무너지지 않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 그 가능성이 민선을 질투하게 했다.
“이유정.”
유정은 엄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미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오리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넌 어떻게 된 애가, 여자가 돼서 몸 하나 간수도 제대로 못 하니?”
낮은 목소리였지만, 말끝에는 날이 서 있었다.
유정은 그 의미를 이해하려 애썼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닿는 결론은 없었다.
“남자 앞에서 질질 흘리고 다니지 말란 말이야.”
유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는 순간, 민선의 말이 겹쳐 들어왔다.
종석이 있는 동안 눌러 담아두었던 울분이 그제야 방향을 찾아 쏟아져 나왔다.
쌓이고, 겹치고, 오래 고여 있던 감정들이 모두 딸을 향해 터져 나왔다.
유정은 말문이 막혔다.
엄마의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들이 향해야 할 곳이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먼저 흘렀다.
입을 열었다간 더 큰 잘못을 말해버릴 것 같았고, 감정을 드러냈다간 또 다른 죄가 덧씌워질 것 같았다.
그렇게 유정은, 또 한 번 엄마가 감당하지 못한 균열을 자기 탓으로 조용히 꿰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