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고등학생이 된 유정을 둘러싼 변화들.

by 김승예

중학교의 연장선일 거라 믿었다. 학생들이 있고, 교실이 있고, 교복과 계절이 바뀔 뿐, 삶의 방식까지 달라질 리는 없다고.

그러나 고등학교의 공기는 처음부터 다른 결을 품고 있었다.
유정은 입학 첫날부터 그 차이를 몸으로 느꼈다.

1학년 전체에서, 남자 교복을 입는 여학생은 유정 하나뿐이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그래도 학년에 셋쯤은 있었다. 그 아이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보았고, 같은 바지를 입고 같은 셔츠를 여민다는 사실만으로도 작은 연대가 되었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면 눈빛만 주고받는 정도의 인사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는 충분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는 그런 여지가 없었다.
몸에 밀착된 상의, 무릎 위로 훌쩍 올라간 치마, 자신의 여성성을 주저 없이 드러내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정은 유일하게 감추는 쪽을 택한 아이가 되었다.
드러내지 않겠다는 선택은 곧, 눈에 띄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유정은 교실 한복판에서 조용히 튀고 있었다.


유정이 진학한 상실고등학교는 중앙 계단을 기준으로 남학생반과 여학생반의 교실이 분리되어 있었다. 학생들의 학업 집중도를 높이겠다는 교육청의 방침에 따른 조치였다.
그러나 그 의도와는 달리, 이 구분은 학생들 사이에서 이성에 대한 상상과 호기심을 더욱 부추겼다.

중앙 계단은 38선이 되기보다는 오작교가 되었다.
쉬는 시간마다 학생들은 그 경계 위에 서서 벌점을 각오한 채 눈인사를 나누고, 쪽지를 건네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이 만남의 밀도를 높였다. 허락되지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피어나는 감정은 언제나 허락된 것보다 더 빠르게 깊어졌다.

변화는 교실 안에서도 분명했다.
중학교 시절, 친구 무리는 좋아하는 연예인으로 갈라졌다면 이제는 훨씬 현실적인 기준으로 나뉘었다.
대학 입시를 말하는 아이들, 외모와 연애를 말하는 아이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눈앞의 욕망과 불안을 동시에 껴안는 일이었다.


입학한 지 채 3주가 지나지 않았을 무렵, 1학년 교실이 몰린 복도와 급식소로 향하는 벽면에
동아리 모집 포스터가 하나둘 붙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종이 위에는 각 동아리의 개성이 빽빽하게 담겨 있었고, 학생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 앞에서 멈췄다.

동아리의 종류는 실로 다양했다.
배구, 축구, 배드민턴 같은 스포츠부터 외국어, 영화 감상, 애니메이션 제작, 댄스, 미술, 봉사활동, 연극, 독서 토론, 과학 탐구, 방송. 그리고 단순한 친목을 목적으로 한 동아리까지. 기껏해야 다섯 개 남짓이 전부였던 중학교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배들은 부족한 잠을 쪼개 아침 일찍 등교해 교문 앞에서 포스터를 나눠주며 후배들을 붙잡았다.
동아리는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유일하게 교사의 지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 획일적인 틀에 맞춰 길러지는 공교육 속에서, 그것은 작지만 분명한 반항이자, 자신의 색을 증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대였다.

그래서 선배들은 동아리라는 그릇에 자신들이 느꼈던 해방과 열기를 담아 후배들에게 그대로 전해주고자 애를 썼다.
후배들 역시, 그들이 말하는 ‘재미’와 ‘자유’를 자신도 맛볼 수 있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동아리 포스터가 붙은 뒤로 담임에게는 관련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담임은 종례 시간에 짧게 정리하듯 말했다.
“4월 첫째 주 수요일부터 동아리 활동 시작한다. 포스터 보고 원하는 데 지원해.
다음 주 창체 시간엔 동아리에서 직접 홍보 올 거니까 그때 들어. 이제 이 얘기는 그만. 더 이상 동아리 관련 질문도 받지 않겠다.”

쉬는 시간마다 교실 곳곳에서 동아리 이야기가 작은 소란처럼 번졌다.
“너 어디 들어갈 거야?”
“난 댄스 동아리 가고 싶은데, 생기부 생각하면 미술부가 맞겠지.”
“난 봉사동아리. 언니 아는 선배가 있는데, 잘하면 내년에 임원 시켜준대.”
“와, 부럽다. 나도 아는 선배 있었으면 좋겠다.”

“근데 한 편으론 배드민턴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어.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선배가 회장이거든.”

동아리는 누군가에게 남녀 분반이라는 답답한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였고, 또 누군가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진로를 증명할 전략적 선택지였다.


유정은 동아리 소식이 달갑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는 혼자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었다. 혼자라는 상태는 노력 없이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고,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동아리는 달랐다. 원치 않는 집단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관계를 만들고,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유정은 그 생각만으로도 관자놀이가 서서히 조여 오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가 들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쉬는 시간마다 늘 혼자 다니던 아이를 슬쩍 바라보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교실 구석에서 조용히 연필을 움직이던 아이였다.
그러나 그 아이의 손에는 이미 애니메이션 제작부 포스터가 들려 있었다.

순간, 쉬는 시간마다 공책 가장자리에 캐릭터를 그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혼자였지만, 고립된 상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이미 정해두고, 그쪽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유정은 그 사실이 묘하게 쓰렸다.
혼자라는 외형이 같다고 해서, 마음의 방향까지 같을 수는 없다는 걸 그제야 또렷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유정은 동아리에 들어가기 싫다는 생각에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불을 끄고 누워 있어도, 머릿속에서는 선택지가 부풀어 오르며 서로 부딪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조차, 이제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유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다음 날,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유정은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큰 소리로 통성명을 해야 했다. 유정은 아파도 조퇴를 말하지 못한 채 참아온 날들이 떠올랐다. 자신의 존재를 소리 내어 증명해야 하는 그 절차가늘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머릿속에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처럼 생각이 부풀어 있었고, 그걸 하루라도 빨리 짜내고 싶었다.
유정은 문 옆에 붙어 있는 통성명 대본을 나지막이 연습하듯 읊조린 뒤, 짧게 숨을 들이쉬고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2학년 3반 이유정. 담임 선생님께 용무가 있어서 왔습니다.”

담임 앞에 서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 유정이네. 어쩐 일이니?”
담임의 목소리에는 반가움보다 확인에 가까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
유정은 오래전부터, 이 통성명 규칙이 자신처럼 반에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아이들을 식별하기 위해 존재하는 장치가 아닐까 의심해 왔다. 그리고 담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서 비로소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 순간, 그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다름이 아니라… 동아리 관련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아… 내가 동아리 질문은 안 받는다고 분명 얘기했을 텐데.”
담임은 말을 자르듯 끼어들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수차례 같은 질문을 받아온 사람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유정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저는 동아리에 들고 싶지 않아서요.”

그 말이 끝나자, 담임의 얼굴에 스친 것은 놀람보다는 피로에 가까웠다.
혼자 남자 교복을 입고 다니는 유정을 보며 막연히 품어왔던 편견이 이제는 구체적인 문제로 모습을 드러낸 셈이었다.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은 학생들을 모아 자습을 시키는 방법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 경우, 교사가 직접 붙어 있어야 했다. 게다가 전 학년에서 자습을 택한 학생이 유정 혼자라면, 그 시간을 맡게 될 교사는 결국 담임 자신일 가능성이 컸다. 담임에게 두 시간의 자유는 꽤나 중요한 자원이었다.

“이유가 뭐니?”
담임은 감정을 완전히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목소리에는 미세한 날이 서 있었다.

“들고 싶은 곳이 없어서요.”

“그럼 나랑 둘이서만 자습해야 하는데, 좀 불편하지 않겠니?”
담임은 이 질문이 유정을 흔들 수 있으리라 믿는 듯했다.

“저는 괜찮아요. 자습이 더 편할 것 같아요.”
유정의 대답은 짧았지만 단정했다.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분명했다.

담임은 한숨을 길게 내쉰 뒤, 방향을 바꿨다. 설득이었다.
“너 대학 가는 거 맞지?”
“네. 아무래도...”
“대학 가려면 생활기록부에 한 줄이라도 더 있는 게 훨씬 유리해. 선생님 생각엔 네 미래를 위해서라도 어디든 들어가서 활동하는 게 좋아 보여. 너무 활동적인 게 싫으면, 독서동아리나 영화감상 동아리도 있잖아. 가서 책 읽고 영화 보는 게 다라던데.”

유정은 더 말해봤자 선택권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네. 감사합니다.”
그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교무실을 나오며 유정은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 같았지만, 적어도 막연했던 선택지는 두 개로 좁혀졌다.
들어가야 한다는 전제가 분명해진 순간, 고민은 오히려 단순해졌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가장 덜 흔들릴 수 있는 쪽을 고르는 수밖에 없었다.
유정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 선택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남을 파문을 만들게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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