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리 신청서를 제출하는 유정.
3교시가 끝나자 유정은 신청서를 손에 쥐고 2학년 교실로 향했다.
종이는 얇았지만 손안에서 묘하게 무게를 가졌다.
2학년 교실은 1학년 반들이 몰려 있는 층보다 한 층 위에 있었다.
유정은 일부러 쉬는 시간의 초반을 골랐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중앙 계단은 소란스러워질 것이 분명했다.
그곳은 오래전부터 학생들 사이에서 묘한 장소로 통했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흘러가고,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도 뭔가를 차지하는 기분이 드는 곳.
유정은 그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자신이 시선의 대상이 되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남자 교복을 입은 여자애라는 사실은 늘 설명보다 먼저 눈에 띄었고, 그 시선에는 호기심과 조롱이 뒤섞여 있었다.
오늘도 계단엔 사람이 많았다.
유정은 잠시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섰다. 거울을 보지는 않았다. 대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이 정도 일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스스로를 밀어붙이듯 중얼거린 뒤 곧장 계단을 올랐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스쳤다. 정확히 자신을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정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윗층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 풀렸다. 아마도 웃음은, 남자 교복을 입은 자신을 두고 나왔을 것이다. 확신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믿는 편이 마음이 덜 어지러웠다.
2학년 층의 공기는 아래와 달랐다.
불필요하게 떠드는 소리도, 계단에 늘어앉아 시간을 흘려보내는 학생도 보이지 않았다. 복도에는 앞선 수업 내용에 관한 질문을 주고받는 목소리와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낮게 깔려 있었다. 떠들지 않는 대신, 모두가 저마다의 계산 속에 잠겨 있는 분위기였다.
유정은 조심스럽게 복도를 따라 걸었다.
노란 명찰이 눈에 띄었는지, 벤치에 앉아 있던 몇몇 학생들이 힐끗 시선을 던졌다가 곧 거두었다. 동아리 모집 기간이라는 사실이, 이 낯선 방문에 붙은 유일한 설명처럼 느껴졌다.
7반 교실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창문 너머로 현이 보였다. 가운데 열, 고개를 숙인 채 책을 보고 있었다.
유정은 잠시 발걸음을 늦췄다.
복도에 나와 있으면 바로 말을 걸 수 있었을 텐데, 교실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엎드려 잠을 보충하거나, 방금 배운 내용을 놓치지 않으려는 얼굴로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를 부른다는 건, 필요 이상의 소음을 만드는 일처럼 느껴졌다.
유정은 한 걸음 물러섰다. 다른 시간에 다시 오자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순간, 화장실 쪽에서 누군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설명회 때 현의 옆에 서 있던, 부회장 강빈이었다. 유정은 반사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다.
강빈은 순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쌀뜨물처럼 뽀얀 피부 위로 듬성한 수염 자국이 푸르게 남아 있었다.
“어… 무슨 일이세요?”
유정은 목이 잠기는 걸 느끼며 말했다.
“저, 동아리 신청하러 왔는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빈의 얼굴이 확 달라졌다.
잠기운은 순식간에 걷히고, 막 짜낸 오렌지 주스처럼 생기가 번졌다. 그는 교실 안을 향해 거의 외치듯 말했다.
“야! 현! 우리 신입 부원 왔어!”
현이 고개를 들었다. 잠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가, 강빈의 손짓을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물함 깊숙이 넣어두었던 신청서를 꺼내 들고 복도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동아리 신청하러 오셨어요?”
가까이 다가온 현은 생각보다 컸다. 유정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 닿기 전에 허공에서 맴돌았다.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결국 가슴께 어딘가에 시선을 걸어두었다.
“네… 안녕하세요.”
“누벨바그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이름이 뭐예요?”
“이유정이요.”
목소리가 너무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단어마다 힘을 주어 말했다.
“아, 설명회 때 잘 들어주셔서 기억나요.”
유정은 놀라 고개를 들 뻔했다. 현은 발표 내내 앞만 보고 있었고, 그녀가 메모를 하던 건 그저 동정에 가까운 행동이었을 텐데.
“신청서는 여기서 바로 쓰세요. 반에 들고 갔다가 작성하고 나서 다시 오기 번거롭잖아요.”
현은 그렇게 말하곤 교실로 들어가 펜을 가져왔다.
그 사이 유정은 숨을 몰아쉬듯 내뱉었다. 가슴이 답답했고, 머리가 잠시 어지러웠다. 산소가 늦게 도는 느낌이었다.
“저기 앉아서 쓰실래요?”
유정이 현의 가르킨 벤치에 앉아 허벅지에 신청서를 올려두자, 현이 두꺼운 책을 내밀었다.
“이거 받치고 쓰세요.”
“감사합니다.”
유정은 고개를 숙이고 글자를 채워 내려갔다.
이름, 반, 연락처. 단순한 정보들이었지만, 손끝은 자꾸만 미끄러졌다.
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데, 분명히 존재하는 시선. 그것이 자신에게 닿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숨이 막혔다.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종이가 젖지 않기를, 글씨가 흐트러지지 않기를 바랐다.차라리 교실에서 써서 가져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다 쓴 신청서를 건네자마자 유정은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뒤 복도를 빠져나왔다.
중앙 계단을 내려와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 앞에 선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몸이 먼저 일을 저질러 놓고, 마음은 아직 따라오지 못한 것처럼.
유정은 하루의 대부분을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한 채 보냈다.
화면을 켜고 끄는 일이 습관이 되었고, 진동이 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도 매번 작은 실망이 따랐다.
현에게서 올 면접 통지 하나를 기다리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잠식했다.
동아리 시작을 사흘 앞둔 시점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자, 마음속에서 불안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혹시 신입생이 충분히 모이지 않아 동아리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아니면, 자신만 탈락한 건 아닐까.
그럴듯한 이유들이 차례로 떠올랐고, 그중 무엇 하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불안은 교실에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들려오는 면접 후기들이 귀에 박혔다.
누가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분위기는 어땠는지.
유정은 대화에 끼어들지 않은 채, 괜히 필통을 정리하거나 창밖을 보는 척하며 그 소리들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은 더 예민해졌다.
현에게 직접 연락해 물어볼까 하는 생각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를 들었다. 신청서에 적은 번호를 다시 확인해 보기도 했고, 메시지 창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보내지 못했다.
괜히 재촉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아니면 자신이 그만큼 절박해 보일까 봐.
무엇보다, 현에게서 돌아올 반응이 두려웠다. 무심한 답장 하나만으로도 지금의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동아리 시작을 하루 앞둔 밤이었다.
침대에 누워 습관처럼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던 순간, 진동이 울렸다. 유정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문자였다.
‘안녕하십니까. 누벨바그 회장 김현입니다. 우선 누벨바그를 지원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면접 공지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기존 계획과 달리, 저희는 면접을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지원해 주신 모든 분은 수요일 동아리 시간에 2학년 7반으로 편하게 오시면 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유정은 문자를 끝까지 읽고 나서야 숨을 내쉬었다.
면접을 통해 동아리가 시작하기 전에 한번 더 현을 마주할 기회는 사라졌지만, 동아리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곱씹어 보니, 애초에 면접을 공지한 것부터가 조금 무리였던 것 같았다.
다른 동아리들처럼 보이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혹은 회장으로서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의 결론은 분명했다.
지원자를 가려낼 만큼의 여유는 없었고, 그렇기에 유정은 배제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유정을 안도하게 만들면서도, 묘하게 마음 한쪽을 찔렀다.
선택받았다는 감각보다는,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까운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유정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로, 수요일이 오면 그 교실에 가야 한다.
현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복도가 아니라, 벽으로 가로막힌 같은 공간에서.
그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한 박자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