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은숙의 갈등

by 김승예

은숙은 처음엔 민선이 성의로 한두 번 얼굴만 비추고 말 줄 알았다.
그런데 민선은 매주 빠짐없이 모임에 나왔다. 지각도 없었고, 빠지는 법도 없었다.
그 꾸준함이 은숙의 마음을 조금씩 풀어놓았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대개 이렇게, 경계가 닳아 없어지는 방식이었다.

무엇보다 흐뭇했던 건 민선이 그곳에서 친구를 사귀었다는 사실이었다.
낯선 얼굴로 들어와 늘 가장자리에만 머물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웃으며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일은 은숙에게 작은 보람이었다.
그 친구가 하필 영주의 남편, 임종석이라는 점은 마음 한켠에 가늘게 걸렸다.
하지만 애주가라는 점만 빼면 그는 평판이 좋았고, 영주와의 사이는 교회 안팎으로 금슬 좋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은숙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괜한 의심은 죄라고. 하느님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자신이 신앙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듯, 민선 역시 이웃의 품 안에서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고 있는 거라 믿고 싶었다. 그 믿음은 선의였고, 은숙은 그 선의를 의심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날도 은숙은 유정과 함께 식사라도 하자고 말할 요량으로 직원 휴게실로 향했다.
마룻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눈을 감고 있던 민선은 인기척에 몸을 일으켰다.

“언니, 오셨어요? 쉬시려면 이불 펴 드릴게요.”

“아니야. 잠깐 얘기나 좀 하려고. 월요일은 언제나 피곤하지?”

민선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푸른 머리를 고무줄로 다시 묶었다. 손놀림은 익숙했고, 웃음은 지나치게 정돈돼 있었다.

“주말 지나고 오니까 아무래도 좀 그렇네요.”

그때, 민선의 발치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진동은 한 번뿐이었지만, 휴게실 안 공기를 바꾸기엔 충분했다. 민선은 반사적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화면을 가리듯 움켜쥐었다. 그러나 은숙의 시선은 이미 발신자 이름에 닿아 있었다.


임종석.


민선은 곧바로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었다.

“언니, 그래서 하실 말씀은 뭐예요?”

은숙은 잠시 말을 잃었다.
모임에서 두 사람이 가까운 건 알고 있었다.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도, 쉬는 시간마다 나란히 앉아 있던 장면도 여러 번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는 건, 생각의 선을 넘는 일이었다.

원래 하려던 말은 목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안으로 삼켜졌다.
은숙은 스스로에게 시간을 벌기라도 하듯, 말을 비틀었다.

“종석 씨 전화였네. 왜 안 받아?”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낮아졌다. 눈빛엔 이전엔 없던, 날이 섰다.

민선은 짧게 웃으며 넘겼다.

“안 받아도 돼요. 언니 얘기부터 해 주세요.”

피하고 있다는 걸 은숙은 알았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영주의 얼굴이, 아이의 얼굴이, 문득 겹쳐졌다.

“모임에서 많이 친해졌나 보네. 사람 괜찮지?”

“네.”

짧고 단정한 대답. 더 묻지 말라는 선이 분명했다. 하지만 은숙은 영주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라는 말은, 때로는 불편한 질문을 허락하는 이름이었다.

“그 사람, 우리 교회에서도 칭찬이 자자해.”
잠시 말을 고르고, 덧붙였다.
“부인한테도 정말 잘하고.”

민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도 나중엔 그런 사람 만나야지. 종석 씨 성격 닮은 홀몸인 남자.”

그 순간, 민선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은숙은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건 부정도 긍정도 아닌, 흔들림이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선은 일어섰다.
휴게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날 이후 은숙은 스스로를 설득했다.
어쩌면 민선은 종석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 스스로 정리했으리라고.

실제로도 두 사람은 예전처럼 붙어 있지 않았다. 웃음은 사라졌고, 말은 필요한 만큼만 오갔다.
은숙은 그 거리를 ‘정리’라고 불렀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종석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민선의 마음이 다치지 않기를 바랐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선의가 헛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믿음은, 해 질 무렵 주차장에서 무너졌다.

모임이 끝난 저녁, 목사 사모가 급히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은숙은 혼자 유아부 교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회원들이 모두 돌아간 뒤, 교실은 텅 비었다.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해가 천천히 산 뒤로 기울었다.

은숙은 고무장갑을 끼고,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세제를 풀었다.
빵 부스러기 몇 개를 닦아내는 일에 굳이 힘을 주는 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감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교회 일은 언제나 그렇듯, 대충할 수 없었다. 그것이 설거지든 청소든, 하느님이 맡긴 몫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러다 노래나 들을 요량으로 주머니 춤을 더듬었다가, 휴대전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전, 차에서 전화를 받다 조수석에 두고 온 기억이 떠올랐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문을 여는 순간, 맞은편에 세워진 하얀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영주의 차였다.

운전석에는 종석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와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손은 상대의 볼을 감싸 쥐고 있었고, 의자는 깊게 젖혀져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여자가 영주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즉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은숙은 닫으려던 차 문을 다시 열고, 조용히 안으로 몸을 숨겼다.
핸들 위에 올린 손이 떨렸다.
아니길 바랐다.
끝까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키스가 끝났고, 종석이 몸을 일으키며 손을 거두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민선이었다. 두 손으로 종석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세상에 자신들만 남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은숙은 숨을 내쉬었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 순간, 자신이 오래 붙들고 있던 선의가 얼마나 무력한지 깨달았다.


그날 이후 은숙은 밥맛을 잃었다.
민선과 영주, 누구의 편에도 설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등을 돌릴 수 없었다.

민선과 종석의 관계가, 어쩌면 자신이 그 모임을 소개한 순간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죄책감이 되어 깊게 파고들었다. 선의로 한 일이, 누군가의 가정을 무너뜨리는 통로가 되었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다.

은숙은 결국 마음을 정했다.
영주가 알기 전에, 민선을 불러 지금이라도 정리하라고 말해야 한다고.

그러나 먼저 연락을 해온 건 영주였다. 평소답지 않게, 술 한잔하자는 말과 함께.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며 은숙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술을 끊고 신앙에 의지해 살던 영주였다. 그래서 그녀가 먼저 술을 말할 때의 무게를, 은숙은 알고 있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영주는 이미 술잔을 들고 있었다.
멀리서 본 어깨는, 평소보다 훨씬 처져 있었다.

“어머, 한영주. 혼자 몰래 마시기야?”

농담처럼 던진 말과 달리, 은숙의 눈은 영주의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눈과 가라앉은 기색이, 말보다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은숙은 알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침묵을 선택하는 건, 더 이상 중립이 아니라는 것을.


은숙은 자리에 앉으며 몸을 조금 낮췄다.
괜히 의자를 끌어당기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까 봐, 조심스레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종석 씨한테는… 말하고 나온 거야?”

영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 느려서, 거절이라기보다는 무력에 가까웠다.

“몰라. 그냥… 나도 잘 모르겠어…”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끝이 매번 흐려졌다. 현악기의 줄을 지나치게 조여 놓은 것처럼,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끊어질 것 같은 소리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비어 있기보다, 말하지 못한 말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영주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사람처럼,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은숙아… 우리 남편이, 많이 변했어.”

은숙은 파전을 찢던 젓가락을 멈췄다. 기름기 묻은 손끝이 괜히 어색해져, 젓가락을 접시에 내려놓고 고개를 기울였다.

“변했다니… 어떻게?”

영주는 대답 대신 소주잔을 움켜쥐었다.
유리잔 안의 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얀 손등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고, 마디마디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주말만 되면 집에도 안 들어오고…”
말이 시작되자, 그동안 눌러두었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같이 얘기 좀 하자고 해도, 내 말은 들으려고도 안 해. 뭘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 그냥… 벽이야.”

영주는 잠시 말을 멈췄다.
숨을 고르려는 듯했지만, 그 사이에도 감정은 계속 부풀고 있었다.

“이유라도 말해주면… 내가 뭘 잘못했는지라도 알면, 그게 낫겠는데…”

끝내 참고 있던 것이 터지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차라리 딴 여자 생겼다고 해줬으면 좋겠어. 이제는 너랑 못 살겠다고 말이라도 해주면 덜 괴로울 것 같아. 근데…”
영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을 지었다.
“그냥 이대로 아무 말도 없이 밀어내니까… 정신적 감옥에 갇히는 게 이런 건가 봐.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소주잔이 테이블 위에 부딪히며 가볍게 흔들렸다. 잔 속의 술이 벽을 치고 다시 가라앉았다.

“이렇게 된 지도 꽤 됐어.”
영주의 목소리는 다시 낮아졌다.
“나… 어떡하지. 내 새끼는 또 어떡하냐고…”

말이 끝나자마자, 영주는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한 번 크게 들썩였고, 이내 참아왔던 울음이 흘러나왔다. 울음은 소리가 크지 않았지만, 오래 버틴 사람의 것이었다.

은숙은 손을 뻗지 못한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차라리 영주가, 자신이 도울 수 없는 다른 이유로 괴로워하길 바랐다.
그랬다면 해줄 수 있는 건 위로뿐이었을 것이고, 그 위로가 무력하더라도 마음은 덜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은숙은 알고 있었다. 영주가 말한 감옥의 문을 여는 열쇠를, 자신이 쥐고 있다는 사실을. 그 열쇠를 꺼내는 순간 누군가는 다치고, 침묵을 택하면 다른 누군가는 계속 갇혀 있어야 했다.

남의 가정사에 함부로 끼어들 수 없다는 말이, 민선이 곤란해질 거라는 걱정이, 지금 이 침묵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은숙의 마음속에서 신앙과 우정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선의는 이미 여기까지 왔다.
이제 남은 건 선택뿐이었다.

은숙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기야.”
영주의 울음 사이로, 은숙의 목소리가 낮게 스며들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놀라지 말고 들어.”

영주는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를 직감한 사람의 눈이었다.
두려움과 기대가 동시에 깃든 눈으로, 영주는 은숙의 손을 움켜잡았다.

“내가 어쩌다가 봤는데…”
은숙은 잠시 말을 멈췄다.
이 한 문장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꿀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석 씨, 여자 생긴 거… 맞는 것 같아.”

말이 끝났을 때, 은숙은 영주의 반응을 감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분노, 절규, 부정.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의외의 표정이었다.

영주의 얼굴에는 충격 대신, 아주 옅은 안도가 스쳤다. 의심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오히려 마음을 정리해주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은 노란 술집 조명 아래에서 차갑게 빛났다.

“어떻게 알게 된 건데?”
잠시 뜸을 들인 뒤, 영주는 물었다.
“여자는… 은숙이 네가 아는 사람이야?”

은숙은 고개를 저었다. 그 움직임엔 미묘한 회피가 섞여 있었다.

“얼굴은 자세히 못 봤어.”
잠시 망설인 뒤 덧붙였다.
“근데… 종석 씨한테는, 내가 말했다고는 하지 마.”

영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는 부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체념과,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인식이 함께 담겨 있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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