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억
여름이 물러난 하늘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높고 깊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닮아 있었다. 붓으로 한 획 긋듯 느리게 흘러가는 실구름들만이, 저 위가 하늘이라는 사실을 겨우 증명하고 있었다. 2학기가 시작되자 교실 안에 남아 있던 낯섦과 경계는 자취를 감췄고, 그 빈자리를 가을바람이 메웠다. 그러나 바람이 지나간 뒤에 남은 것은 상쾌함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공백 같은 것이었다.
하복에서 춘추복으로 갈아입으며 옷의 색이 짙어진 만큼, 아이들의 얼굴에도 어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단풍은 피처럼 붉어지고, 은행잎은 누렇게 마르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마다 나무 아래 모여 사진을 찍는 아이들의 웃음은 분명 웃음이었지만, 봄의 벚꽃 나무와는 달랐다. 무언가를 미리 잃어본 사람들처럼, 웃음의 끝이 늘 조금 빨리 닫혔다. 누군가는 단풍잎을 주워 책갈피에 끼워 넣었다. 훗날 우연히 그 잎을 발견했을 때의 자신을 상상하며, 이미 지나간 시간을 예습하듯이.
창가에 앉은 유정은 창틀에 이마를 기댄 채, 은행 열매를 피해 까치발로 걷다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소리는 유리 너머에서 나는 것처럼 멀었다. 동아리 시간이 끝나자 현이 다가와, 늘 하던 대로 DVD를 내밀었다.
“감사해요.”
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현은 DVD를 건넨 손을 바로 거두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정아… 나는 네가 축구를 그렇게 잘하는 줄 몰랐어.”
말은 가볍게 던진 것 같았지만, 그 말이 공중에 닿는 순간 유정의 시간은 잠시 멈췄다.
“네? 축구요?”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미 확인된 사실이라는 듯.
“월요일 점심시간에. 너희 학년 애들이랑 운동장에서. 전반전 끝나고 쉬는 시간에 나한테 인사도 했잖아.”
유정은 그를 바라보았다.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그날’이라는 단어가 텅 빈 방처럼 울렸다.
“제가… 축구를 했다고요?”
현은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듯, 말을 고르며 다시 말했다.
“기억이 안 나? 너 진짜 잘했어. 골도 몇 번이나 넣고. 혹시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유정은 대답하지 못했다. 축구를 좋아한 적도, 해본 적도 없었다. 공을 찼을 때의 감각, 흙 냄새, 운동장의 소음 같은 것들이 떠올라야 하는데, 머릿속은 깨끗했다. 마치 그날의 자신이 통째로 잘려나간 것 같았다.
‘내가 했는데, 내가 모르는 일.’
그 문장이 서늘하게 가슴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유정은 더는 서 있을 수 없어 조용히 자리를 떴다. 현은 뒤에서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그 소리는 이미 유정의 귀에 닿지 않았다. 복도를 걸어가며 유정은 몇 번이나 바닥을 내려다봤다. 분명 두 발로 걷고 있는데, 감각은 한 박자씩 늦게 따라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유정은 곧장 윤을 찾았다. 복도는 지나치게 길었고, 양옆으로 늘어선 방문들은 전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어디로 들어가도 같은 방일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그 복도의 한 지점에서, 문 하나가 열려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그곳은 돔 경기장이었다.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관중석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좌석은 모두 비어 있었다. 인조 잔디가 깔린 필드는 지나치게 깨끗했고, 안내 방송도, 발자국 소리도 없었다. 침묵이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인위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유정은 천천히 관중석을 내려와 필드에 섰다. 발밑의 잔디가 미세하게 눌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그 순간, 이곳이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빠. 윤 오빠.”
목소리가 돔 안에서 몇 겹으로 겹쳐 울렸다.
왼편 선수 대기실 문이 열리며 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늘 보던 얼굴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낯선 얼굴.
“여기까지 찾아오셨네.”
윤은 웃으며 필드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중앙에 누워, 팔을 머리 뒤로 깍지 끼고 하늘을 바라봤다. 유정을 향해 손짓했다.
“와서 앉아. 보기보다 편해.”
유정은 망설이다 그의 곁에 앉았다. 까슬한 잔디가 피부에 닿자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이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싫었다.
“여긴 뭐야.”
“축구장.”
“왜 하필 축구장이야.”
윤은 잠시 웃음을 멈췄다.
“내가 고른 게 아니거든.”
유정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누가.”
“너.”
그 말은 너무 담담해서, 농담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유정아, 내가 있는 곳은 항상 네가 만든 곳이야. 여긴 네 본체야.”
유정의 숨이 가늘어졌다.
“난 이런 데 만든 적 없어.”
“기억 못 하는 거겠지.”
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위로도, 변명도 아닌 톤이었다. 그게 더 불안했다.
유정은 잠시 침묵하다 낮게 말했다.
“나 요즘… 내가 한 일을 내가 몰라. 그리고 그 일들이 전부, 나답지 않아.”
윤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래서 무서운 거야?”
“무서워.”
유정은 솔직했다.
“내가 내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근데 혹시 말이야. 그게 네가 아니라는 증거일까? 아니면… 네가 아직 몰랐던 네 모습일까.”
그 말에 유정의 속이 서늘해졌다.
“월요일에,” 유정이 말했다. “나, 축구를 했대. 남자애들이랑. 웃으면서.”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봤어.”
“오빠도?”
“봤지.”
유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부정할 구석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럼 그 애는… 누구야.”
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일어나, 말없이 대기실 쪽으로 걸어갔다. 유정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윤은 답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말하지 않기로 선택하고 있을 뿐이었다.
돔 경기장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