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by 김승예

현관 앞에서 유정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문턱 바로 앞에 놓인 발끝이 바닥에 닿은 채 멈춰 있었는데, 마치 낯선 집의 공기를 먼저 살피려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그 망설임이 너무 오래 이어지자, 현 역시 괜히 목이 마른 사람처럼 침을 삼켰다.

현은 말없이 유정의 짐가방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 옆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편할 순 없겠지만… 네 집처럼 생각하고 지내.”

현이 그렇게 말하자, 유정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문턱을 넘었다.

방 안에 들어선 뒤 유정은 한 발짝 더 걸어 들어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온 공간을 살피는 사람처럼 시선이 이곳저곳을 조용히 훑었다. 그러는 사이 잔뜩 경직돼 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창문 아래에는 작은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반쯤 마른 머그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책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그 너머로 조명등이 켜져 방 안을 따뜻하게 덮고 있었다.

유정은 그 공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군가 혼자 오래 지내온 흔적이 묻어 있는, 조용한 방이었다.

“너 먼저 씻을래? 아니면 내가 먼저 씻을까? 어떤 게 편해?”

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정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전 나중에요.”

짧은 대답이었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유정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그리고 그 붉은 기운은 방 안을 채운 노란 조명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잠시 뒤, 현이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의 머리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고, 수건으로 대충 털어낸 탓에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현은 문틈으로 김이 흘러나오는 욕실 안으로 유정을 데리고 갔다.

“여기 선반에 수건 있어.”

그는 손으로 선반을 가리키며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샴푸야. 나는 린스를 안 써서… 내일 꼭 사 놓을게. 이건 세안제고, 샤워 타올도 이거 쓰면 돼. 아, 그리고 수도꼭지가 좀 말썽이라—”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욕실 앞에서 잠깐 서 있다가 천천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직전, 두 손을 가볍게 맞잡고 숨을 한 번 고르는 모습이었다.

“저… 모르는 거 있으면 그때 가서 물어볼게요.”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유정이 샤워를 하는 동안 현은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 자정까지 보내야 할 자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노트북을 켜고 논문 파일을 띄웠다.

하지만 화면 위의 글자들은 좀처럼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손은 키보드 위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졌고, 모니터에 떠 있는 활자들은 마치 컵 안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흐릿하게 흔들렸다.

욕실 쪽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일정했다. 타일을 두드리는 물줄기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그 규칙적인 소리가 오히려 현의 마음을 더 어지럽혔다.

현은 무심코 펜 끝으로 손가락을 눌러 보았다. 그러다 책상 위에 이마를 가볍게 부딪치기도 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머릿속은 자꾸 같은 방향으로 기울었다. 의자가 끼익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렸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샤워기 아래에서 물을 맞으며 서 있는 나체의 유정, 그리고 그 젖은 머리칼 위로 조심스럽게 거품을 얹어 주는 자신의 손.

그러나 그 상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타일을 두드리던 물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욕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따뜻한 김이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고 그 사이로 젖은 머리칼이 먼저 보였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온 유정은 손으로 목덜미를 가볍게 만지며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왔다.

현은 인기척을 느끼고 몸이 어색하게 굳었다. 급히 노트북을 덮고 어색하게 다리를 꼰 채 경직된 고개를 돌렸다.

“헤어 드라이기 줄까? 머리 말릴래?”

말은 가볍게 건넸지만 목소리에는 아주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머리가 짧아서 금방 말라요.”

그리고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시간이 늦었네요.”

말끝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얹혔다.
조금 전보다 훨씬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샤워 후의 은은한 습기가 방 안에 남아 있었다.
그 속에서 유정의 피부는 마치 하얀 유약을 입힌 도자기처럼 희고 맑은 빛을 띠었다. 현의 시선이 무심코 그 목덜미에 머물렀다. 그리고 순간, 그곳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 감정은 꼬인 다리 아래 어딘가에 조용히 눌러 두었다.


현은 방 안의 형광등을 끄고, 침대 옆 스탠드만 켜 두었다.
은은하게 번진 불빛이 방 안을 부드럽게 감싸며 벽과 바닥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 빛 아래에서 현은 유정을 침대 가장자리에 앉히고, 바닥에 이불을 펴기 시작했다. 이불을 한 번 털어 바닥에 고르게 펼치고, 베개를 옆에 놓았다.

“오빠, 그냥 제가 바닥에 잘게요. 저 원래 바닥에서 자주 자요.”

유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끝은 어딘가 민망한 듯 흐려졌고, 그 사이로 발끝이 이불 위에서 꼼지락거렸다.

현의 눈에는 그 모습이 어쩐지 우스꽝스럽고도 사랑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꾸 대신 그대로 바닥에 몸을 눕히더니,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려 뒤집어썼다.
마치 더 이상의 논쟁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한동안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유정은 결국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침대 위의 베개를 한 번 정리한 뒤, 조심스럽게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잘 자.”

이불 속에서 현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잘 자요.”

유정도 작게 대답했다.

잠시 후 스탠드 불이 꺼졌고, 방 안에는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 방 안은 두 사람의 얕은 숨소리로만 채워졌다.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흘러가도, 어느 쪽에서도 깊은 숨이 이어지지 않았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먼저 잠든 쪽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와야만 비로소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상대 역시 같은 마음으로 잠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서로 알지 못했다.

유정은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 잠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말하지 못한 계절이 있었고, 피하지 못한 이유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유정은 책상 위 유리에 희미하게 비친 달빛의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빠, 자요?”

바닥에 누워 있던 현은 두 팔을 머리 밑에 괴고 있었다. 하나뿐인 베개는 이미 유정에게 내어준 상태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해야 할 진실이 눈앞에 다가오자,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잠깐 숨을 고른 뒤, 마치 탄식처럼 짧게 내뱉었다.

“아니.”

어둠 속에서 유정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내가 왜 학교를 안 나가는지… 왜 상실 시를 떠났는지… 오빠한테 연락도 못 했는지.”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런 거 안 궁금해요?”

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궁금하지.”

“그런데 왜 여태 안 물어봤어요?”

유정이 조용히 몸을 뒤척였다. 얇은 이불이 작게 부스럭거렸다. 그 작은 소리조차 방 안에서는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다.

“우동 먹을 때도… 집 오는 길에도 기회는 있었잖아요.”

현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너한테 부담 주고 싶지 않았어.”

그 대답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유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아빠를 찾아갔던 날의 이야기.
그때 마주했던 아버지의 얼굴.

그리고 어느 겨울밤, 엄마와 함께 갔던 저수지.

사라진 오빠.

이모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던 일까지.

유정은 그 모든 일을 차분하게, 거의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마치 오래된 라디오를 다시 틀어 놓은 것처럼 담담했다. 너무 여러 번 되뇌어서인지, 이제는 그것이 자신의 삶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들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현은 침대 아래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가볍게 들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숨을 죽인 채 유정의 이야기를 받아냈다.

유정의 마지막 말이 조용히 사라졌다. 그 뒤로 방 안에는 무서울 만큼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삼킨 뒤, 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기는.”

목소리는 낮았지만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 질문은 방 안의 공기를 조금 더 무겁게 만들었다.

유정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병원 가 줄 수 있어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혼자서는… 너무 무서워서…”

말끝이 오래된 풍금처럼 흔들리며 부서졌다.

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짧게 대답했다.

“응.”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유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참고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오빠…”

흐느끼는 사이로 말이 이어졌다.

“…저 밉죠?”

그 말을 던지자마자 유정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현도 바로 몸을 일으켰다. 문턱 앞에서 유정의 앞을 부드럽게 막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유정을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유정이 약하게 밀어냈다. 하지만 그 힘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몸에 힘이 풀리며, 유정은 조용히 현의 품 안으로 기댔다. 현의 몸에 닿은 유정의 배는 말보다 많은 것을 전하고 있었다.

현은 유정의 짧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잠깐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너를 미워한 적 없어.”

손이 천천히 머리 위를 쓸어내렸다.

“단 한 순간도.”


유정은 모든 이야기를 털어내고 나서야 한결 가벼워졌는지, 이불을 덮은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조용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현은 귓가에 맴도는 숨결이 점차 깊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몰래 화장실로 가 과제를 마무리했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바닥에 앉아 침대 위 유정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유정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작고 하얀 앞니가 드러났고, 눈꺼풀 아래로는 파란 실핏줄이 미세하게 얽혀 있었다. 그 모습은 한없이 평온하면서도, 이상하게도 가슴 저릿한 느낌을 안겼다.

유정은 오랜 시간 지쳐 있다가 방금 막 안식에 도달한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어제처럼 오늘도 눈이 부어 있겠지...’

현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 상처로 얼룩진 유정의 삶에 자신이 작게나마 볕 한 줌을 드리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이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가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깊고도 결연한 숨을 내쉬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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