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선의 사람, 은숙
민선은 아직 처녀였던 시절, 일하던 김치 제조 공장에서 은숙을 처음 만났다.
일을 마치고 퇴근 길 통근 버스에서 은숙은 민선에게 먼저 말을 걸어 왔다. 민선이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는데도, 은숙 언니는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답지 않게 해맑은 얼굴로 첫날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마치 오래 간직해 온 선물 보따리를 하나씩 열어 보이듯, 숨김도 망설임도 없었다.
“자기도 상실동 살지? 나 진짜 몰랐어.”
“네, 계속 거기서 살았어요.”
“나도 출근길 통근 버스에서 자기가 나랑 같은 데서 내리는 거 보고 얼마나 반갑던지 몰라.”
“상실동에서 오래 사셨나 봐요.”
“거기서 태어난 건 아니고, 그냥 오래 살았지.”
“아, 네...”
“나는 말이야, 스무 살 되자마자 고향 언니랑 이곳저곳 떠돌면서 노래방에서 일했어, 그러다 상실동에서 지금 신랑 만나서 애 낳고, 쭉 거기서 살았지. 보다시피 지금은 그 일 관뒀어. 애 낳고 주님 만나고 나니까 이젠 그렇게는 못 살겠더라고. 우리 아들래미랑 예수님 덕분에 새사람 된 거지. 어머, 자기 표정 좀 봐. 많이 놀랐구나? 내가 너무 솔직했나 봐.”
“아... 아니에요. 그냥...”
민선은 뜻밖의 고백 앞에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말은 부정했지만, 얼굴엔 놀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뭐 어때. 이제 다 옛날 일인데.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이 어딨다고. 사람은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지면 되는 거지. 그때야, 내가 철없던 시절이었지. 주님 품에서 회개한 거야.”
“그럼, 남편분은 노래방에서 만나신 거예요?”
“아니야, 소개로 만났어. 우리 신랑은 그런 데 안 가. 완전 범생이야, 범생이. 천상 착한 사람이라구. 그래도 노래방에서 일한 게 다 나빴던 건 아니야. 거기서 좋은 언니, 동생들도 많이 만났고, 또 그런 직업이다 보니까 남자 상대하는 요령도 좀 트이고... 순진한 우리 남편도 내가 잘 꼬셨지.”
은숙은 스스럼없이 웃었다.
“그때 같이 일하던 언니, 동생들도 시집 다 잘 갔어. 다 부잣집에 갔지. 나는 돈으로만 보면 그렇게 잘 간 건 아닌 셈이야. 근데 그래도 말이야, 우리 부부 금술만큼은 누구보다 좋을걸?”
그녀는 김치를 버무릴 때마다 고무장갑 속에서 함께 일한 손, 그 손에 낀 반지를 자랑하듯 내보이며 살짝 입을 맞췄다.
보석 하나 없는 반지는 평범했지만, 그녀의 얼굴엔 은근한 자부심이 번졌다. 요즘 같은 세상엔, 신혼이 아닌데 반지를 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부러운 일이었다.
“우리 신랑, 얼마나 착한지 몰라. 처녀 때 나한테 혼이 빠져서, 얼마나 날 쫓아다녔는지... 실은 지금도 그래. 퇴근하고 집에 오면, 내가 샤워하기 전엔 김치냄새 난다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려도, 끌어안기 전엔 절대 안 놔. 어휴, 그이 고집은 말도 못 해, 하하.”
민선은 은숙이 말을 튼 첫날부터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그녀가 자신을 오래 볼 친구라 여긴 건지, 공장에서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는 자신은 입소문을 내지 않을 거라 여긴 건지, 아니면 원래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속을 여는 사람인지, 그 진의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행동의 동기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강은숙‘ 이라는 인물이 풍기는 그 맑고 숨김없는 기운은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부끄러울 법한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는 그녀의 의연한 태도, 심지어 양심이라곤 없는 것처럼 가벼워 보이기까지 한 그 담담함은, 민선의 마음속 잔상이 지닌 어둠을 어느새 서서히 희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괜히 자신만 무거운 짐을 달고 시간을 낭비해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죄책감과 후회에 품고 산다고 밥 한 숟갈, 땡전 한 닢 더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걸 하느님에게 넘기고 속 편히 사는 은숙의 모습은, 민선에게 작지만 뚜렷한 인식의 전환을 안겨주었다.
민선은 열 번을 다시 태어나도 은숙처럼은 살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샘이 났다.
민선이 마음을 다 열기도 전부터, 은숙은 여러 방면에서 그녀를 도와주었다.
어느 날, 공장의 대리가 보너스를 미끼로 민선에게 잠자리를 요구한 일이 있었다.
이를 거절 하자 화가 난 그는 그녀가 동료들을 배신하고 혼자 보너스를 챙기려 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모두가 민선을 몰아세울 때, 은숙은 직장을 잃을 위험까지 무릅쓰고 사실을 알리며 그녀의 편에 섰다.
남편은 떠났고, 형제들과는 멀어졌으며, 삶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낄 수 없던 민선에게 은숙은 유일하게 온기를 있었던 사람이었다.
누명을 쓴 일은 시간이 지나 겨우 수습이 되었지만, 우울증약 복용 사실까지 알려진 뒤, 결국 부당하게 해고당한 민선을 집에서 끌어내 지금 다니는 마트에 취직시켜준 것도 은숙이었다.
하지만 민선은 남편을 만나고 온 이후로 은숙의 연락도 받지 않은 채, 마트에도 나가지 않고 집에서 술만 마셨다.
걱정된 은숙은 수소문 끝에 유정에게 따로 연락해, 민선을 방문해도 괜찮을지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민선이 전화는 받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방문은 허락했다는 것이다.
은숙이 민선의 집 앞에 다다라 초인종을 누르자, 유정이 문을 열고 나왔다.
“안녕하세요.”
“네가 유정이구나. 이모가 너희 엄마한테 네 얘기 많이 들었어, 엄마 닮아서 그런가 예쁘기도 하네.”
은숙은 유정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집 안은 한낮임에도 암막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마치 밤처럼 어두웠다.
“왜 이렇게 컴컴하게 지내니?”
“엄마가 밝은 걸 싫어하셔서요.”
“어머, 이게 뭐야.”
은숙은 무엇인가에 발이 걸려 휘청이다가,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발끝에 닿는 물체는 가볍고 단단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다 먹은 도시락의 쓰레기였다.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은숙은 손을 뻗어 벽을 더듬고는,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며, 민선이 눈부심에 인상을 찌푸린 채 은숙을 맞이했다.
“언니, 오셨어요? 집이 많이 누추하죠.”
민선의 머리는 며칠을 감지 않은 채 엉겨 붙어있었고, 베개 자국이 선명한 얼굴은 방금 일어난 사람의 것이었다. 그 처참만 몰골에 은숙은 그만 입을 벌린 채, 말을 잊었다.
민선은 뒤늦게 자신의 행색이 부끄러운 듯,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입가에 맺힌 웃음은 흐릿하고 기운이 없었다. 아직 술이 덜 깬 사람처럼, 몽롱하고 무기력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은숙의 눈가에는 이내 눈물이 차올랐다.
울음을 들키지 않으려 괜히 뒤를 돌아 무심코 커튼을 걷자, 그 뒤에 숨겨져 있던 빈 술병들이 햇빛 아래 드러났다.
민선은 나른한 기색을 숨기고 유정을 향해 노려보는 눈빛을 보냈다.
‘손님 오기 전에 알아서 치워놓지 않고 뭐 했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모든 걸 말해 주었다.
유정은 당황했다.
은숙이 남의 집 커튼을 함부로 젖힐 줄은 꿈에도 몰랐던 터라 억울함에 발만 동동 굴렀다.
난처한 표정을 짓는 유정을 바라보며 은숙의 속은 복잡하게 뒤엉켰다.
과거, 공장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민선과 함께 맞서 싸웠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런 자신과의 연락을 민선은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그 배신감. 그리고 엄마가 되어서도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느냐는 괘씸함. 그 모든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속상함을 내보이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건만, 결국 은숙은 참아왔던 감정을 더는 억누르지 못하고, 그만 터뜨리고 말았다.
은숙은 유정이 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민선에게 달려들어 사정없이 등을 내리쳤다.
“자기, 미쳤어? 자식 키우는 여자가 사는 꼴이 이게 뭐야?
남편이 떠났으면, 그 놈이 후회할 만큼 잘 살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아도 모자랄 판에, 이게 뭐야. 술병에, 네 꼴에... 나랑 연락 끊고 마트까지 안 나온 이유가 이 짓하려고 그런 거였어? 정말 왜 그래, 왜 이러는 건데.”
민선은 술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얼굴로 얼떨떨하게 은숙을 바라보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은숙의 매운 손맛에 몸을 움찔거리더니, 마치 그 손길을 오래도록 기다려 온 사람처럼, 저항도 없이 등을 내주고는 은숙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민선의 눈물은 마치 마음 깊은 곳에 고여 있던 슬픔이 드디어 터져 나온 것처럼, 쉼 없이 흘러내렸다. 은숙이 지쳐 손을 거두었을 때도 민선은 멈추지 못했다. 혼자서 가슴을 두드리며, 한참을 울었다. 이참에 마음속에 뭉쳐 있던 응어리를 모두 토해내려는 듯이.
“언니... 나 찾아줘서 고마워요. 근데요... 나, 너무 힘들어요.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도 숨이 막혀요. 저도...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아요. 근데 왜... 왜 나는 남들처럼 사는 게 그렇게도 힘든 걸까요?”
은숙은 눈시울을 붉힌 채 민선의 손을 꼭 잡았다.
“너 힘든 거, 나도 알아. 진짜 다 알아... 그래도, 너는 애 엄마잖아. 엄마가 이러면, 애 밥은 누가 먹여? 매니저한테 너 아팠었다고 다 말해 놨으니까, 얼른 마트 나와. 알았지?”
민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