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되어간다는 것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바깥의 결빙은 거의 다 풀렸지만, 서릿바람은 여전히 코끝과 귓바퀴를 예리하게 스쳐 갔다.
나뭇가지마다 연둣빛이 움트기 시작했고 어떤 날은 한두 시간쯤 싸라기눈이 흩날리다 말았다.
계절은 분명 봄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아직 완전히 넘어가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유정은 그 풍경을 보며, 자신도 저 나뭇가지 같다고 생각했다.
겉은 어딘가 자꾸 달라지고 있는데, 마음은 여전히 겨울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몸은 이미 다음 계절로 넘어가 버렸는데, 정신은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어딘가에 멈춰 있었다. 그래서 요즘 들어 날씨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건, 자기 몸이었다.
복도마다 히터가 내뿜는 무거운 공기 안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떠들어댔다. 그들은 복도를 뛰어다니며 어른들이 부러워할 만큼 단단하고 가벼운 세계를, 빈자리마다 다시 쌓아 올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계절의 경계 같은 모호함을 우스워하며 밀쳐내는 것처럼 보였다.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유년의 제국이었다.
그러나 유정은 그 소란 속에서도 자기 몸의 변화만큼은 밀쳐낼 수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르는 가슴, 스스로 낯설어지는 살결, 원치 않아도 자꾸 자라나는 ‘증거들’.
몸이 자신보다 먼저 어른이 되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 변화는 마치, 계절과 달리 자연스럽지 않은 쪽에서 시작되는 듯했다. 유정은 가끔 그 모든 것을 누군가의 실수처럼, 자신에게 잘못 배송된 성장으로 여겼다.
봄이 오는 건 괜찮은데, 몸이 변하는 건 무섭기만 했다.
계절은 환영받지만, 자신의 변화는 숨기고 싶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유정은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는 가슴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낯설고 괴로웠다.
몸이 자라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억지로 어디선가 물풍선을 가져와 덧붙여 놓은 듯했다.
마음은 여전히 아홉 살쯤에 멈춰 있는데, 몸은 혼자 어른이 되겠다고 앞질러 가며 그녀를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더 끔찍한 건, 그 변화가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몸이 제멋대로 부풀고, 늘어나고, 모양을 바꾸며 “넌 이제 이런 존재야”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모든 움직임이 혐오스러웠다. 내 몸인데, 내 뜻으로는 멈출 수 없다는 게.
유정이 ‘여자’라는 존재를 처음 본 기억은, 이미 아빠가 없었던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간 목욕탕에서였다.
등을 구부린 어머니의 젖가슴, 거칠게 피어난 털, 남편을 헐뜯으며 웃던 여자들의 붉은 살결.
그 모습들은 유정에게 여자가 곧 상처이고, 무게이고, 지워지지 않는 피로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도 저 형태로 변해갈 거라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끔찍했다.
어떤 날은 스스로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싫었다.
몸이 나를 배신한 것 같았고, 나는 그 안에 갇혀 있는 감정의 유령 같았다.
밤이 되면 유정은 가슴을 바닥에 눌러 엎드려 잠들었다.
그 부푼 살이 다시 꺼지기를, 내일 아침이면 아무 일도 없던 듯 사라져 있기를, 하늘 어딘가에 속삭이듯 기도했다.
제발, 자라지 말게 해달라고.
제발, 나는 아직 다 큰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처음엔 시간이 지나면 이런 감각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은 해결이 아니라 ‘증명’만 했다.
달마다 찾아오는 붉은 고지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섰다는 걸 상기시켰고, 거울 속에서 또렷해지는 곡선들은 “넌 더 이상 아이가 아니야”라는 문장을, 누구보다 잔혹하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유정은 결심했다.
몸을 가리고, 감추고,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한꺼번에 끌어안은 채, 1학년 때 입던 여학생 교복을 학교에 기부하고 남학생 교복을 받아 왔다.
펑퍼짐한 셔츠와 느슨한 바지 속에 들어앉으면, 잠시나마 몸의 경계가 흐려지고, 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쇄골 아래로 기른 머리카락도 미련 한 줌 남기지 않고 짧게 잘라버렸다.
그것이 진짜 해결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은 그저 그 안에 숨고 싶었다.
윤은 그녀를 보자마자 피식 웃었다.
“야, 너 거울 좀 봐. 진짜 학원 땡땡이치고 피시방 가는 남자애 같아. 완전 중학생 남학생이 따로 없어.”
유정도 지지 않고 맞받았다.
“하나도 안 웃기거든? 거울은 네가 봐. 턱에 샤프심 박힌 줄. 어우, 보기 싫어.”
둘 사이의 투닥거림은 예전과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어딘가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말은 장난처럼 오갔으나, 그 안에 섞여 들어온 낯선 감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윤이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엔 유정의 팔뚝만큼 가늘기만 하던 팔에 제법 근육이 붙고, 좁았던 어깨가 넓어졌다. 언제부턴가 키가 쑥 자라 유정의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고, 통통하던 볼살도 빠져 단단한 선이 드러났다.
그 변화는 한순간에 찾아온 것도 아니었지만, 문득 시선을 맞추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처럼 느껴지곤 했다.
유정은 그런 윤을 바라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그도 자신처럼, 몸이 낯설어지는 순간을 겪고 있을까.
변화가 두렵지는 않을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그에게도 숨어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막상 그 말을 꺼내려 할 때마다, 윤은 짧게 자른 유정의 머리카락과 남학생 교복을 들먹이며 장난처럼 웃어넘겼다.
그가 웃는 순간엔, 대화의 문이 매번 닫혔다. 유정은 그 틈을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하면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말하는 순간, 진짜로 어른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그랬다.
유정의 짧은 더벅머리와 남학생 교복을 입은 낯선 용모는. 아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복도를 지나다 멈칫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곁눈질을 보내는 아이들.
그들 가운데 성격이 활달하고 호기심이 많은 몇몇은 결국 유정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너 혹시, 왜 남자 교복 입는 거야?”
그 말에는 비하도 조롱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 어린 궁금증이었고, 말끝은 엷은 기대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유정은 그런 관심을 조용히 튕겨냈다.
“그게 편해서.”
단순명료한 대답이었고, 그 이상은 묻지 말라는 무언의 단절이었다.
유정은 자신도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을 타인에게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윤이란 존재가 이미 자신에게 충분한 관계였기에, 그 밖의 사교는 귀찮을 뿐이었다.
처음엔 몇몇이 슬쩍 다가왔지만, 유정의 조용한 방어는 번번이 그 호기심을 밀어냈다.
성장기의 관심이란 늘 그렇듯, 빠르게 끓고 금세 식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몇 주가 흐르자, 유정은 반 아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조금 이상한 애‘로 분류되었고, 그 분류는 더 이상의 침해 없이 유정을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 구석은, 유정이 바라던 정확히 그만큼의 거리였다.
타인의 말이 닿지 않고, 시선이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안전지대.
유정은 그곳에서, 조용히 자신을 지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