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봄을 좋아하세요?

by 김승예

교실은 이제 히터를 틀지 않아도, 외투 하나만으로 견딜 만한 정도로 제법 훈훈해져 있었다.

회색빛에 잠겨 있던 세상이 물러가자, 따뜻해진 공기가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잔잔한 숨결을 밀어 올렸다. 얼어붙어 있던 대지는 미세한 떨림으로 살아났고, 깨어난 존재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봄을 말했다.


이른 아침, 가장 먼저 학교에 도착한 유정은 조용한 교실 한가운데에 앉았다.
아직 히터의 잔열이 남아 있는 공기 속에서, 창밖으로는 목련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풀릴 듯한 그 빛깔은, 유정의 빈 가슴을 잠시 환하게 채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선이 조금 더 머물자, 꽃잎 아래 드리운 그림자가 이상하리만큼 길어 보였다. 검은 가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봉오리는, 마치 철로 위에 선 안나 카레니나의 드레스처럼 보였다.찬란함과 비극이 한 몸에 얽힌 그 형상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순간, 바람 한 줄기가 교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떨어진 꽃잎 하나가 유정의 바랑 위에 내려앉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서글픔이 한순간에 퍼졌다.
봄이 찾아왔음에도, 자신에게는 딱히 환한 계절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그 감정이 깊게 번지자, 유정은 문득 숨이 막히는 듯했다.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는 사실이, 그 순간만큼은 너무 확실했다.
그래서 결국, 유정은 잠들어 있던 윤을 조용히, 그러나 다급하게 흔들어 깨웠다.

마치, 자신이 무너지기 전에 누군가를 붙잡아야 한다는 예감을 따라가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봄은... 쓸쓸한 것 같아.”
유정이 낮게 말했다.

“자는 사람 깨워서 하는 말이 그거야?”
윤이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보통은 따뜻하고 꽃 예뻐서 좋아하잖아. 왜 쓸쓸해?”

“모르겠어. 화려할수록... 더 슬퍼져.
휘황찬란한 포장지로 본질을 가려버리는 것 같아서.”

“역시 별난 내 동생.”
윤이 피식 웃었다.
“그럼 넌 어떤 계절이 좋아?”

“글쎄... 그건 생각해본 적 없어.”

“봄은 싫고, 좋아하는 계절도 없다는 거야?”
윤이 어이없는 듯 물었다.

“괜찮은 날은 있지만, 먼저 계절을 좋아했던 적은 없어.
어떤 하루가 좋았고 그게 겨울이었다면, 그날의 겨울을 좋아하는 거고.
여름이었다면 그날의 여름이 좋은 거고.”

“하긴,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사람들 보면 ‘가을은 낙엽이 예뻐서 좋아’ 같은 이유가 있잖아.”

“좋아하는 계절을 꼽긴 어렵지만,
봄이 싫은 이유는 분명해.”
유정이 윤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럼 오빠는? 어떤 계절이 좋아?”

“나는... 방에만 있으니까, 계절을 본 적이 없어서.”
윤이 말끝을 흐렸다.
유정의 눈에 스친, 말 없는 자책을 알아챈 듯 곧 말을 이었다.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고르라면… 봄.”

“왜?”
유정의 눈빛이 조금 맑아졌다.

“내가 봄을 좋아하면, 너도 조금은 따라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해서.
계절이 좋아져야 그 안에 담긴 하루하루도 즐거워질 거잖아.”

“좋은 날이 쌓여서 계절을 좋아하게 되는 게 아니라,
계절을 먼저 좋아하면 좋은 날이 따라온다는 거네.
역시 우리 오빠, 똑똑하다.”
유정이 미소 지었다.

“근데 넌 꽃을 봐도 안 예뻐?
그게 또 쓸쓸해 보인다는 건 무슨 논리야?
나는 보고 싶어도 못 보는데.”
윤이 장난스럽게 유정의 볼을 꼬집었다.

“언젠가 보여줄게.”

“무슨 수로?”
윤이 놀란 듯 되물었다.

“모르지. 그치만… 언젠가 보여줄 수 있는 날도 오겠지.”

시곗바늘이 여덟 시 이십 분을 넘자 교실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유정은 인기척에 놀라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나 간다!”
간단히 인사를 남기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다시 학생의 얼굴로 돌아갔다.


점심을 마친 유정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반장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유정아, 담임 선생님이 지금 교무실로 오라셨어.”

뜻밖의 호출이었다.
유정은 모범생도, 문제아도 아니었다.
성적이 특별히 뛰어난 것도, 지도 대상이 될 만큼 눈에 띄는 아이도 아니었기에
담임에게 불려간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마음이 불편하게 일렁였다.

가끔 교사들은 조용히 겉도는 학생들을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내곤 했다.
대화의 끝은 늘 “너도 어울려 살아야지” 같은 충고로 마무리되었다.
유정은 자신이 그런 부류에 포함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디서 잘못 보였는지 되짚는 마음이 계속 어지러웠다.


교무실 문 앞에 도착한 유정은 짧게 숨을 고르며 손잡이를 눌렀다.
문이 열리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스며 나왔고,
점심을 일찍 마친 교사 몇몇이 자리에 앉아 조용히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정은 그 사이를 지나 담임의 책상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제야, 시야 뒤편에 가려져 있던 풍경이 드러났다.

엄마가 앉아 있었다.
침묵이 오래 굳어 얼굴에 내려앉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유정의 가슴을 단번에 무겁게 짓눌렀다.
이토록 조용히, 조심스럽게 살아왔는데
학교에 어른을 불러야 할 만큼 큰 잘못이 자신에게 있었단 말인가.

그 사실이 아직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유정은 잠시 자신을 바깥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엄마는 유정의 인기척을 느끼고도 눈을 들지 않았다.

마치 이미 모든 결론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아무 말 없이 담임과 마주 앉아 있었다.

담임은 그 냉랭한 공기를 깨기 위해 과장된 반가움으로 유정을 맞았다.

“유정이 금방 왔네? 유정이가 어머님 닮아서 이렇게 예쁜 거였네요. 어머님은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예쁜 딸을 두셔서. 반 친구들도 유정이를 참 좋아해요.”


입가를 과하게 찌푸리며 웃는 담임의 얼굴에도, 엄마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담임의 미소는 허공에 붕 떠올랐다가 쓸쓸히 꺼졌다.

그제야 담임은, 이 자리에 감도는 공기가 예상보다 훨씬 무거움을 직감한 듯, 표정을 수습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상담은, 교무실 이곳저곳에 흩어진 교사들의 묵묵한 시선과 팽팽한 침묵 속에서 시작되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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