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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Jun 15. 2016

고향을 여행한다는 것

44일간의 여행_ 1.제주도

너무 많이 변해버려서 이제 다시는
예전의 우리로 돌아갈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제주도는 나날이 변하고 있었다.

고교시절에는 없었던 북유럽 취향의 레스토랑이 서귀포 시내에 들어서 있고, 논현동 집앞에서 24시간 불 밝히고 있던 프랜차이즈 카페가 용담동 북쪽 해안절벽에 버젓이 들어앉아 있어도 어색함이 없다.

학창 시절 소풍 때마다 학교 측의 안일한 스케줄링으로 매 시즌 가던 외돌개 근처도, 대기업에 취업한 초등학교 동창처럼 말끔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런 마당에 소풍날 촌스럽게 세운 앞머리를 휘날리며 수건 돌리기를 하던 모습 같은 건, 이제 굳이 꺼내어 말하지 않는다. 나도 세월에 이렇게 변한 마당에 너라고 여전할리 없으니까.

친구와 나는 그저 걸었다. 수건 돌리기를 하던 잔디는 이제 사람들이 들어가 걷지도 못하는 관상용이 되어서 그냥 산책로를 걸었다. 외돌개를, 쇠소깍을, 해안도로를, 중문 바닷가를.


내가 그리도 탈출하고 싶었던 곳. 그래도 나이 들어 언젠가는 돌아와 여생을 바칠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감히 가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촌스러웠던 초등학교 동창이 너무 잘 나가는 인기남이 되어 버리자, 그를 가지고 싶어 하는 여자들의 경쟁에서 나는 슬쩍 발을 빼버리고 싶었다. 늙어서까지 제주도에 땅 한 평 살 자신이 없다기 보단 너무 변해 버린 남자에 대한 어딘가 야속한 마음으로.

중문 백사장에 앉아 오고 가는 파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백사장의 모래가 하얀색 스니커즈에 덕지덕지 붙었다. 모래들이 양말을 파고든다. 머릿속이 흩어져있는 잡념들도 그 모래들과 같다. 바다는 말한다. 집으로 돌아갈때 신발을 털면 그뿐이야.


친구와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백사장을 지나 다시 콘크리트 땅을 밟는다. 그리고 신발을 벗어 바닥에 대여섯번 친다. 그렇게 잡념들을 잠시 털어냈다.

다시 들른 바닷가에서 파도를 생각한다. 수천 년을 한결같이 해변에 부딪히고 다시 흘러가지만, 한 번도 같은 모양으로 물방울이 튀었을 리 없다.


늘 같은 풍경인 듯해도 매 순간 다른 움직임이 펼쳐지는 곳. 매일 다른 사람들이 찾아와 생각과 고민들을 늘어놓는 곳. 그러나 결국 단순하게 반복되는 하나의 풍경으로, 모든 사사로움이 무심하게 수렴되는 곳.

너무 멋지게 변해버린 지금의 제주도나, 어떤 의미로든 많이 변해버린 지금의 내모습이나, 결국 세월 속에서 한번 스쳐간 파도 같은 것. 그저 무한하게 반복되는 자연 속 하나의 사소한 운명일 뿐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모든 것은 그렇게 파도처럼 하얗게 부서지고 잘게 흩어져서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풍경이 내게 준 것은 위로가 아니라 ‘우주 속 먼지’가 된 것 같은 가벼움이었다. 이 풍경에 낯선 이들이 몰려와 황금장식을 둘러놓아도 결국엔 어릴적과 같은 것을 느낀다.

이곳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어딘가 야속했던 마음도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세련된 카페들이 없던 시절에도 온전히 아름다웠던 곳. 그들이 너무나 완벽해서 오히려 나는 아무것도 할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마 이곳을 떠나고 싶었나 보다.

그러한 마음으로, 내가 이 땅에서 다시 터를 잡고 산다고 해도 온전히 제주도에 마음을 바치지도 않을 것이고, 이렇게 가끔씩 돌아온다고 해서 남의 고향이 될 리도 없다.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 어머니는 제주도 출신의 며느리와 2박 3일의 환갑 투어를 즐기셨고, 엄마는 간만에 찾은 딸과 어버이날 식사를 함께했고, 조카들은 이모에게 때마침 어린이날 선물을 받았으며, 고향 친구는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처음으로 고향 ‘방문’이 아니라, 고향 ‘여행’을 한 기분이 들었다. 새로 생긴 좋은 곳들도 찾아가고,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는 풍경과 사람들도 만났다. 새로운 것들이 오래된 것들을 밀어내고 있는 안타까움도 보았다. 하지만 중문 백사장에서 그랬듯 세월 속에서 스쳐가는 파도처럼, 이 순간의 거품도 이내 바다로 흘러가고 말 것이다.

그렇다.

제주도는 나날이 변하고 있고, 하나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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