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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Jun 17. 2016

서울 거주자에서 여행자로

44일간의 여행_ 2. 서울

언젠가 ‘내 집은 어디인가’에 대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 ‘제주도 사람’의 정서가 뼛속 깊이 박혀있지만, 성인이 된 후 치열하게 살며 진짜 ‘성장’을 한 곳은 서울이었다. 그리고 인생의 두 번째 플랜을 준비하면서, 나는 상하이로 건너왔다.


어떤 곳은 꿈을 좇아서 떠났고, 어떤 곳은 다른 꿈을 꾸기 위해서 떠났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 제주도에서도, 서울에서도, 상하이에서도 모든 곳의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언젠가 내 집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내 짐이 있는 곳’이라고 심플하게 대답했던 친구가 있다. 십 수년 해외 생활을 해온 사람다운 답이었다. 이번에 긴 여행을 다녀오며 이제야 그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침대가, 내 베개가, 내 슬리퍼, 내 책상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내 짐이 있는 곳, 그곳이 내 집이었다.

근 이십 년을 서울에서 살아서, 고향인 제주도보다는 서울에 더 많이 방문한다. 치열하게 살던 그 시절의 친구들이 여전히 온 힘을 다해 살고 있다. 그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정체된 것 같은’ 일상의 고단함을 들어주고, ‘이제 무엇이 되어야 할지 모르는’ 내 인생의 불안함에 대해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꿈에 그리던 ‘진짜 한식’을 먹으러 간다. 서울에서 맛집을 찾아 지도 앱을 켜는 모습이 영락없는 관광객이다. 서울에서 회사를 14년이나 다녔는데도, 아는 건 가로수길 카페뿐이라니.

블로거들의 가르침을 받아 보물 찾기를 하듯 식당과 카페를 찾아다녔다. 서울에서 회사를 다닐 때는 한 번도 하이힐에서 내려오지 않았으므로, 걷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늘 지쳐있어서 매일 택시 안에서 늘어져있곤 했다. 그러니 걸어 다니면서 서울을 느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상하이에 살면서 나는 걷기의 왕, 요즘 말로 ‘프로 산책러’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서울 거주자가 아닌 여행자로 돌아온 것이다.

나처럼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은 학교 근처,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한다. 어차피 남의 집에 세를 내서 사니까 회사 근처 집주인에게 주는 게 낫다. 돈을 아끼려고 먼 동네에 집을 구했다간, 매일 야근으로 월세 만한 돈을 장거리 택시비로 써야 했을 테니까. 광고회사는 대부분 강남에 있으므로, 나는 강남에서 14년을 살았다. 홍대 연남동 경리단길 이태원 삼청동 같이 멋스러운 강북은 요즘 20대 중국인 관광객보다도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운동화를 신고 이태원을 걷고, 시청 앞을 구경하고, 청계천의 카페를 다녔다. 내가 언젠가 ‘서울길 산보’라는 제목으로 콘셉트로 서울 여행책을 내볼까 농담 삼아 얘기했더니, 남편이 말했다. "자기는 직립 보행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그랬던 내가 진짜 산책을, 산보를 했다. 그것도 하루에 만 오천보를 걸으면서.

상하이에서는 극장에 못 가고 늘 PC로 영화를 본다. 영화도 영화지만 극장에 굶주렸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막 시작하는 순간의 짜릿함을 느껴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인지 서울에 와서는 여행지의 영화 관람 같은 낭만적 기분이 아니라, 굶주린 사자가 한 달 만에 사슴 뜯어먹는듯한 허기로 극장을 찾았다. 요새 흥행한다는 영화들을 대부분 보고 나서야 갈증이 조금 해소되었다.


그중 ‘곡성’이 제일 좋았다. 인간은 어쩌면 끝끝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지막 순간까지 혼란스러워하는 효진이 아빠는 그렇게 모든 인간을 대변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함께 있어 더 좋았다.

서울여행을 마치는 날, 동생과 마지막 점심을 먹었다. 상하이에서는 찾을 수도, 만들어 먹을 수도 없는 소울 푸드, ‘콩나물 국밥’을. 식당 밖에는 나를 태우고 갈 공항 리무진 버스가 시간을 조이고 있었다. 다른 때보다 청양 고추를 조금 더 넣었다. 상하이로 돌아가면 화장실에서 화끈하게 한번 더 콩나물 국밥을 느끼게 될 것이지만.


리무진 버스 창 밖에서 임신한 동생이 한 손으로는 부른 배를 받치고, 한 손은 나를 향해 흔들었다. "언니 또 와." 하고 입모양으로 말하는 동생이 웃는 것인지 울려는 것인지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엄마는 제주도에, 언니는 상하이에 사는 동생이 홀로 아이를 낳을 두려움이 떠올라 갑자기 미안해졌다. 기저귀 같은 건 이모가 갈 수 없어.라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때 동생의 출산일에 맞춰서 다시 서울에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20년을 살며 늘 말했었다. 서울이 싫은데, 서울이 편해.

여기선 내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다 알 것만 같았다. 목표는 있었지만 희망은 없었다. 십 수년 열심히 달렸고 크고 작은 목표들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남들처럼 발 맞춰가야 하는 인생과 그로 인해 예상되는 미래는 어딘가 답답했다. 상하이에서는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는 불안함 속에서, 막연한 희망 같은 게 생겨나기도 했다.


몇 달 후 태어날 조카에게는, 짐작되지 않는 인생이 펼쳐지길 바라본다. 비행기를 한 두 시간만 타면 어디든 갈 수도,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도 알기를 바란다. 예전의 나보다는 더 많이 걷고 즐기는 사람이 되어 가끔은 '서울의 여행자'가 되어보길 권한다. 서울은 걸어보니 좋은 곳이었고, 언제 어디로 떠나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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