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일간의 여행_ 3. 파리 ① 천국의 계단
가끔은 일상이라는 고무줄을 풀고
13시간의 비행을 해야만 하는 때가 온다
혹시 파리 안 가실래요? ‘앞뒤 없이’라는 건, 이런거겠지. 그런데 느닷없이 튀어나온 나의 대답. 그러자.
상하이에 봄이 찾아온 어느 날, 서울의 S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파리 여행을 제안했다. 대화를 하고 싶어요.라고 또박또박 써 보낸 글자들을 보면서도 나는 믿기지 않았다. 파리에 가보고 싶어요. 가 아니라 대화를 하고 싶어요. 라니. 진짜 놀라웠던 건, 그때의 내 심정이 그녀와 같았다는 거다.
사실 S가 있는 서울도, 내가 있는 상하이도 ‘집중 대화’의 장소로 적합하지 않았다. 각자의 도시에는 각자의 일상이 있다. 일상이란 발목에 맨 고무줄과 같다. ‘일상 속 해야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나의 발목으로 이어진 긴 고무줄. 12시 이전에 찾아오는 귀가의 탄성이나, 시도 때도 없는 회사 복귀의 탄성력은 그중 가장 강력하다. 고무줄을 잠시 풀고 먼 곳으로 떠나야 했다.
파리는 내게 여섯 번째다. 관광이 필요 없는 도시. 대화의 장소로 적합했다. 그래도 너는 처음 가보는 거잖아. 구경해야지.라는 내 물음에, 그녀 다운 대답이 이어졌다. 아무 데도 안 가도 돼요. 카페에서 얘기나 하시죠. 어차피 세상은 시시해요. 하지만 5월의 해가 가득 찬 오전 열한 시의 노천카페에서 낭만적 건물들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카페 알롱제를 마시는 순간에도, 그녀는 세상이 시시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당장 뱅뱅사거리 고층 빌딩 속 회색 파티션 아래에서 그녀를 구출하고 싶어 졌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상하이에서는 내 중국어 실력 때문에 대화의 양과 질이 무척 낮았다. 가끔 만나는 한국 친구들도 있지만, 오랜 시간 서로를 잘 알아온 사람들과의 '진짜 대화'가 그리웠다. 나 역시 뱅뱅사거리 고층 빌딩 속에 있던 시절, S와 나는 매일 만나 시시콜콜 이야기를 했었다. 사실 '진짜 대화'만 된다면 사실 파리의 카페 알롱제가 아니라 회사 카페의 저급한 아메리카노도 좋다. 오랜만에 토크를 할 생각에 신이 나서 비행기표와 숙소를 검색했다. 투어 스케줄은 짜지 않았다. 우리의 목적지는 길가의 흔해빠진 카페가 될 테니까.
오페라 근처에 집을 구했다. 집주인의 친절한 메모 ‘비밀번호를 누르고 정문으로 들어와서 정원의 오른쪽 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탄 후, 3층 오른쪽 집 도어매트 아래 있는 키를 꺼내고 다시 내려가서, 정원의 왼쪽에 있는 초록색 문을 열고 계단으로 끝까지 올라가면’ 너네 집.이라는 정신없는 말에 홀려서 우리는 미쳐 알지 못했다. 그곳은 꼭대기 옥탑 방이었다. 중세 유럽 영화에나 나오는 좁고 가파른 나무계단을 빙빙 돌며 오르다가, 정신보다 허벅지가 화가 나 터져버릴 쯤에 ‘살려는 드릴게’ 하며 나타나는 집. 라푼젤이 살았던 집이 분명하다. 허벅지보다는 내 긴 머리를 땋아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열흘 동안 강제 스쿼트를 하며 우리는 늘 말했다. 집에 갈 땐 에너지를 10% 꼭 남겨둬야 해요. 아니면 올라가다 죽어요 우리.
옥탑방은 좁기도 많이 좁았다. 작은 거실 위로 더블 매트리스 하나가 꼭 맞는 복층 침실이 있었고, 사람 하나가 서 있으면 완전히 가득 차는 욕실, 그리고 90년대식 소파베드 옆에 사선으로 붙어있는 창문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티 내지 않았지만, 처음 그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반전 효과는 바로 다음 날부터 나타났다. 백팔배 같은 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가는 순간, 그곳이 천국 같아 보이는 거다. 백팔 배 후 신을 영접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매트리스에 누워서 하늘을 마주하는 천창, 거실의 높은 창 너머로 보이는 이웃집 지붕의 오렌지색 굴뚝 행렬은 아름다웠다. 천창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마저도. 어딘가 비밀스럽고 조금은 애처로운, ‘파리를 사랑한 이방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집이었다. 급기야 우리는 그 옥탑방을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열흘이 지나 그곳을 떠날 때, 나는 다시 울고 싶어 졌다. 두 가지 이유로. 천국 같은 이 집을 떠나야 한다니. 그리고 자신의 한계치를 넘어 터져버릴 듯한 23킬로 캐리어를 들고 이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니.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 캐리어로 봅슬레이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