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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Nov 11. 2016

"문을 열어 두세요. 당신에게도 그게 좋아요"

영화 [While we're young] 위아영

‘젊음’이란 말은, 젊지 않은 사람들의 무지개

경주마처럼 달리다 어느 순간 명함을 보니 부장이 되어있었다. 뿌듯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이 정확한 연차의 결과. 내 또래보다는 젊어 보인다는 말도 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는 상대적으로 더디게 늙기 마련이니까. 무엇보다도 내게 젊음에 대한 동경이 없다.


사실 내가 영화 속 제이미와 다비의 나이였을 때도 젊기 때문에 무엇도 할 수 있고, 무엇도 될 수 있던 시절은 이미 없었다. 그때의 나는 오히려 ‘프란시스 하’의 그들과 비슷했다. 세상이 정해놓은 동그라미 안에 편입되기 위해,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서자 동그라미의 더 안정적인 안쪽으로 진입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젊음’이란 단어는 무지개 같은 것이다. 정작 무지개가 떠 있는 자리는 빛과 얼마간의 수분이 있는 ‘현실적인 공간’이지만, 멀리서 보면 닿고 싶은 어떤 아름다움인 것처럼.  

어른 같지 않은 또 다른 어른의 세계

며칠 전 개봉한 지 1년도 넘은 영화를, 선배의 추천으로 보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조쉬와 코넬리아를 만났다. 그들의 일상이 어쩌면 그렇게 우리와 닮았는지 초반 여러 장면들에서 웃음이 터졌다. 아이를 낳은 친구와 유아 음악 강좌에서 멘붕을 겪는 코넬리아가, 언젠가 친구를 따라 키즈 카페에 가서 지옥을 경험했던 내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나이가 들면서도, 아이가 없는 부부의 생활이란 어딘가 경계가 좀 불분명한 ‘어른의 세계’다. 조쉬의 말처럼 다음날 당장 프랑스행 티켓을 끊을 수도, 젊은 후배와 힙합 댄스를 배울 수도 있지만, 점점 떨어지는 체력에 낙담하고 아이를 가진 친구들과는 멀어지는 또 다른 어른의 세계다.

조쉬의 환심을 사는 건 비교적 쉽다

광고회사에는 제이미와 다비의 모습을 한 신입사원이 해마다 들어온다. 그들은 낯선 말투와 눈빛을 하면서도 ‘아주 낯익은 저 연차의 공손함’을 장착한다. 조쉬를 처음 만난 제이미의 표정처럼 얼굴에 활기와 존경심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이때 관계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영화에서처럼 사실, 젊은이다.


특히 권위적인 사람들일수록 자신에게 칭찬과 존경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약하다. 후배가 선배의 환심을 사기는 쉬워도, 반대의 경우는 쉽지 않다. 그들은 진심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조직 문화가 그렇고, 미움받지 않는 방법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회의시간에 늘 말하곤 했다. “그래도 솔직해져라. 그래야 너를 믿을 수 있다. 너의 의견이든, 너든."

정작 조쉬가 제이미에게 빠져든 이유

조쉬가 말하는 ‘우리 나이 사람들’이란 ‘성공과 결과에 집착하고 과정에는 관심이 없는’ 세대다. 그런 조쉬에게 제이미 부부의 일상은 충격이었다. 현재에 집중하고, 일의 과정 자체를 즐기며 관대하기까지 한 사람들. 정작 자신은 그런 훌륭한 젊은이를 질투나 하는 소심쟁이니까.


40대의 조쉬 부부는 아이폰으로 음악을 듣고,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며, 온라인 게임을 하고, 런닝머신을 달린다. 반면 20대의 제이미 부부는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듣고, VCR로 영화를 보며, 보드게임을 하고 길거리 농구를 한다. 조쉬의 눈에 그들은 모든 것을 몸으로 느끼며, 편리한 것보다는 재미있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경주마처럼 ‘결승점’으로만 달리다 목표 지점을 놓쳐버린 순간, 조쉬는 광야를 자유롭게 달리는 그들을 보았다. 그들과 함께하면 다시 젊은 말이 되어 힘차게 달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코넬리아의 힙합댄스와 나의 발레

언젠가 남편이 디제잉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과 경쟁적으로 취미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어 서둘러 발레를 끊었다. 수십 가지 댄스 클래스가 있는 학원에는 젊고 건강한 활기가 넘쳤다. 내친김에 재즈댄스도 배웠다. 아직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는 나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쿵쿵 심장을 울리는 음악 소리가 좋았다.


하지만 4개월 후, 염증난 발목 엑스레이를 보며 의사는 심각하게 말했다. 발레요? 지금 나이에 갑자기 이러시면 안 됩니다. 힙합 댄스를 배우던 코넬리아의 관절은 무사했을까.

그런데 우리는 정말 친구였을까

언젠가 내게 한없는 존경을 표현하며 살갑게 대하던 후배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호의와 쾌활함에 매료되어 순식간에 후배에서 친구로 승격시켰다. 지인들을 소개시켜주며 직장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그녀가 이직과 인맥 때문에 나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통해, 나보다 더 도움이 될만한 이를 찾아 좋은 회사로의 이직에 성공했다. 그리고 곧 바쁘다는 핑계로 관계는 소원해졌다.


나이가 들면 그런 것쯤 익숙해지고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때의 나는, 영화 속 조쉬처럼 대범하지 못했다. 어른들은 그렇게 점점 마음의 빗장을 잠근다. 그런데 문을 닫고,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으면 과연 행복한가.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춥기만 한가. 영화를 다시 보니 오프닝의 대화가 그제서야 마음에 와 닿는다. “젊은이들에게 문을 열어 주세요. 그들이 살며시 들어오도록. 당신에게도 그게 좋아요.”

우리는 늘 답을 찾는 과정에 있다

어린 시절, 나도 다비처럼 ‘우리가 어떻게 나이 들어갈지 늘 궁금했다’ 그 답은 지금의 내 모습일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내가 최종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늘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우리의 답은 늘 갱신된다. 사실 조쉬가 제이미에게 얻고 싶었던 것은 그저 ‘젊음’이 아니라 ‘새로운 활기’였을 것이고, 결국 얻은 것은 ‘유연함’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한계도, 타인의 욕망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알고 보면 제이미도 세상의 안정적인 동그라미 안에 진입하고 싶었던 한 청년이었을 뿐이었다.


노련하면서도 유연한 어른으로 나이 들어간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렇다면 오프닝의 조언처럼 ‘문을 조금 열어’ 보면 어떨까.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해와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았던 안의 먼지도 드러내고, 정리된 것들을 흐트러 놓을 것이다. 하지만 눅눅했던 안의 공기는 늘 새롭게 환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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