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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Dec 15. 2016

질투가 우리의 힘이 되기를

영화 [Sully] 설리_허드슨강의 기적

영화 [설리]가 안겨준 두 가지 질투에 대하여

할 일을 제대로 하는 리더가 있다는 것


‘기적’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을 기대하는 것도, 어떤 일의 결과가 기적이라 말하는 것도 어딘가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일이든 이유와 그에 따른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기적이라는 말은, 때로 책임을 다한 사람들과 책임을 다 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를 방치한다.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랜덤으로 내려주시는 비정기적인 선물이 아니다. 산타클로스가 하룻밤 사이에 온 세계의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는 기적은, 제 할 일 하는 부모가 있어 해마다 이루어진다. 세상에 공짜 기적은 없다. 

그런데 ‘요즘의 한국인’으로서 다시 생각해보니 허드슨 강의 ‘기적’은 기적이 맞겠다. 모든 사람이 생존한 것이 기적이라기보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제대로 한 것'이 요즘 같아선 기적이 아니겠는가. 


나는 십 수년간의 직장생활에서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가를 목격했다. 회사에서 결과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일종의 벌이다.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벌을 받기 쉬운 사람’이 된다. 그러니 책임을 지려는 자들은 점점 적어지고, 최소한 책임을 지려는 마음, 책임’감’ 또한 점점 사라지는 게 아닐까. 책임감이라는 말은, ‘그렇게 달콤한 것이 우리한테 아직 남아있기는 헌가’라는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아득하다. 적어도 지금의 우리 시대는. 

며칠 전 어느 시사 프로그램을 보았다. 두 해 전 수백 명이 바다 한가운데서 희생되는 것을 전 국민이 목격하며 안타까워하던 날, 대한민국의 리더가 그 시각 무엇을 했는가를 조명하는 내용이었다. VIP를 모신다는 누군가와 해경의 통화내용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생존자가 몇 명입니까. VIP에게 지금 빨리 보고를 해야 한다니까요?! 빨리요. 숫자만 빨리 말하세요!!

영화 속에서 기장인 설리가 다급하게 말했다. 승무원을 포함한 전 승객은 155명. 155명입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보고를 해야 할 숫자가 아니라 반드시 자신이 들어야 할 생존자의 숫자였다. 그리고 그가 병원 간이침대에서 들었던 숫자는 바로 그것. 원피프티파이브. 이 장면을 4번이나 봤는데도 짜릿했다. VIP 보고용 숫자가 아닌 우리 모두가 들었어야 할 바로 그 ‘사람의 숫자'.

솔직히 질투심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요즘의 한탄스러운 시국과 맞물려 ‘저들은 대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마음을 다잡고 결국 영화를 보았다.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우리 상황을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나서 울음이 났다’ 던 친구의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이 영화는 너무나 유명한 실화이므로 내용에 대해선 말이 필요 없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무척 노련했다. 놀랍도록 담담한 태도. 마치 세상에서 가장 큰 상어를 잡고도 그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며 상어의 배를 가르는 늙은 어부의 뒷모습 같았다. 이런 이야기를 흥분하지 않고 말하기란 너무 어려운 것인데 말이다. 그러다 마지막에 엔딩 크레딧에 분명하게 쓰여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이름을 마주했다. 


존경할만한 보수주의자가 있다는 것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좋아하지만, 그의 연출작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 밖에 보지 못했다. 감독으로서 그의 명성도 익히 들어왔지만 연출 스타일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는 순간,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미국이라는 자신의 나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신의 나라가 지향하는 가치들을 (자극과 흥분 없이도) 얼마나 감동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지. 동시에 그가 뼛속 깊은 보수주의자라는 것도. 영화를 다시 되감아보니 그의 모든 연출이 그러했다. 오래전에 보았던 ‘밀리언 달러 베이비’도 기억을 되짚어보니 그랬다. 그는 자신의 가치관을 영화 속에 꼼꼼히 담아내는 사람이었다. 

이제껏 많은 미국 영화가 미국 우월주의를 담아왔다. 조금은 느끼해도 ‘자국의 영화’로서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온통 백인 미국인이 지구를 구하는 이야기에도 크게 동화되거나 설득되지 않았다. 내게 애초에 미국에 대한 동경심 같은 게 없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설리]를 보고서는 달랐다. 

리더든 그를 따르는 자든,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결과에 자만하지 않으며, 최선의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묻고, 반대 의견에 대해 고뇌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잃지 않고, 아랫사람을 존중하고, 어떤 순간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 당신의 나라라면, 나는 조금 부럽다.


설령 이 이야기가 실화가 아니었다 해도, 그러한 미국의 가치를 이토록 노련하고 아름답게 연출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나는 저기 먼 그들의 나라에 질투심이 생겼다. 

이 영화 역시 또 다른 방향의 ‘미국식 영웅주의’ 일 것이다. 아이언 마스크나 비브라늄 방패 없이 '노련함과 책임감'만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영웅. 나에게는 가장 설득적인 방식의 '미국 영웅'이었다. 

뒤늦게 검색을 해보니, (나만 몰랐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타공인 보수주의자였다. 하지만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미국의 그릇된 영웅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내게는 없었던 '존경할만한 보수주의자'의 새로운 모델이 되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다름 아닌 ‘인적 요소’다. 어떤 난관에 처해 있더라도 결국 인적 요소가 모든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소불위의 영웅이 아니다. 설리의 대사처럼 ‘우린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보여주는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서의 영웅.


동력을 모두 잃고 위태롭게 비행하고 있는 지금, 우리나라에도 그런 영웅은 있다. 안타깝게도 높은 자리의 사람들이 아니라 촛불 든 거리의 사람들. 타국에서 생활하는 내게, 초겨울 찬바람 속에서도 촛불을 들고 담담히 서있는 그들의 모습은 충분히 영웅적이었다. 


허드슨 강에서 구조된 부기장이 강 너머 뉴욕을 보며 말했다. “오늘처럼 뉴욕이 좋았던 적이 없어요.” 오늘처럼 우리나라가 좋았던 적이 없다고 말하는 날도, 곧 와주기를. 우리에게도 그런 영웅들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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