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푸루(安福路) [Baker & Spice]
노트북을 들고 집을 나서고서야 생각한다. 오늘은 어느 카페가 좋을까. 하루 종일 작업을 할 수도, 중간에 잠깐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앉아있는 시간이 길 테고, 출출한 때가 올 것이다. 빵이나 케이크류의 디저트가 준비되어 있으면 든든하다. 라지 사이즈의 아메리카노가 있고, 화장실이 깨끗하며, 와이파이가 잘 터지고, 전원 콘센트를 편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 카페 종업원들이 내게 신경을 쓸 정도로 한가롭지 않고, 물이나 냅킨을 따로 부탁하지 않도록 어딘가 마련되어 있으면 좋겠다. 마침 괜찮은 음악까지 흘러 준다면 아...!
여기까지는 흔한 별다방의 스펙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내가 이 카페를 선택하는 이유는 아주 사소하지만, 특별한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카페의 위치다. 안푸루(安福路)는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 길 중에서도 매우 한가롭고 고즈넉한 동네다. 일방통행의 좁은 길에는 ‘쌩쌩 달리는’ 차도 없다. 차보다는 자전거나 전동차가 더 많고,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걸어가는 사람보다도 많다. 이 길에는 귀엽고 예쁜 샵들이 갓 구운 식빵의 건포도처럼 박혀있다.
여기는 마치, 은행나무와 유니크한 샵들이 늘어서있던 십 수년전의 한가로운 가로수길을 닮았다. 그 시절의 가로수길에 내가 다니던 회사가 있었다. 면접을 보던 날, 팀장은 자신의 방 창문 너머 늘어선 은행나무를 보며 말했다. 나는 이 창가 풍경이 좋아서 이 회사에 들어왔어. 그날 이후 나는 그 팀장의 부사수가 되었고, 회사를 떠날 때까지‘그런 가로수길’을 사랑했다. 지금은 거기에 남아있지 않은 낭만이, 상하이 안푸루에 다시 펼쳐져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이 모든 낭만을 품에 안은 카페가 놓여있는 것이다.
카페 앞에는 6인용 정도의 커다란 나무 테이블이 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옹기종기 앉아 ‘밖’의 여유를 함께 즐긴다. 이 도시의 개들은 종종 그 테이블의 반대쪽 기둥에 묶여 주인의 대화를 가만히 엿듣는다. 커다란 테이블을 지나 카페의 통 유리문을 열면, 순간 ‘약간 탄듯한 빵 굽는 냄새’가 게릴라처럼 들이닥친다. 치명적이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노랑머리의 서양인들이 가득 차 있다. 여기가 유럽인가 중국인가. 그래, 이런 게 상하이다. 중국식 오래된 건물들을 헐어내지 않고 내부만 현대식으로 개조한 카페나 식당들에, 전 세계에서 몰려와 기꺼이 객지 생활을 하는 외국인들이 넘쳐나는곳. 프랑스 조계지라서 그런지 프랑어가 유독 많이 들린다.
나 또한 외국인으로서 현지인이 있는 곳도 재미있지만, 외국인들끼리 잔뜩 몰려있는 것도 신기하다. 이들에게는 사람이 ‘자신의 본거지에서만 나오는 나른함이나 대담함’이 없다.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에도 어딘가 조심스러운 표정이 숨어있다. 그러나 이내 ‘모두가 이방인’이라는 데서 오는 묘한 안도감과 동질감으로 편안해지고 만다. 마치 외국의 경유지 공항 대기의자에 전세계의 이방인들이 모여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 직원들도 대부분 영어를 한다. 때론 귀엽게 한국말 몇 마디도 한다. 메뉴도 익숙하다. 최고는 아니어도 수준급의 디저트 메뉴와 ‘사기당하는 느낌이 전혀 없는’ 브런치 메뉴들, 정당한 가격의 맛있는 파스타들이 올 스탠바이. 한낮에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한 ‘도서관 책상’ 스타일의 테이블도 있다. 노트북을 서로 마주 대고 종일 앉아 커피를 마시고 끼니를 채우다 보면, 이게 혼밥인지 겸상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머리 위로는 전 세계 어디서든 사랑받을 것 같은 팝송이 흘러나오는데 요즘은 애드 시런이 메인이다. 3층 화장실을 갈 때면 옆자리 손님에게 노트북을 봐달라는 부탁도 어색하지 않다. ‘혼자’들이 많고, ‘외지인’이 많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를 이해한다. 이방인이 아닌 현지인에게 부탁을 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늘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보곤 한다. 넌 여기 왜 왔니. 넌 상하이가 좋니. 응 너무 좋아. 하는 순간 그들의 눈은 반짝인다.
이 카페의 장점은 ‘올백은 아니어도 전과목 90점이 넘고, 동시에 사교성과 훈훈한 외모를 지닌 모범생’에 가깝다. 하지만 진짜 매력은 이 아이가 가진 ‘혼혈성’이다. 동양적 아담한 키에 검정머리, 하지만 크고 맑게 빛나는 연갈색 눈동자는 저 멀리 인디언의 대륙에서 온 것이 분명한. 혼혈아이 같은 매력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세계는 그렇게 한 자리에서 이해되고 포용되며, 이방인에게도 현지인에게도 새로운 매력을 발산한다.
퇴근하듯 카페를 나서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그 동네를 조금 걸어봐도 좋다. 고즈넉한 안푸루의코너를 ‘우회전’으로 돌아 우루무치루(乌鲁木齐路)를 걸으면 더 좋다. 유럽의 길을 걷다 갑자기, 중국의 어느 시대로 순간이동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루무치루에 있는 ‘아보카도 레이디’ 야채가게에서 이름 모를 채소를 사 보는 것도 재미다. 옥수수를 고르다 보면 방금 전, 베이커 앤 스파이스의 옆자리에 앉았던 파란 눈의 외국인과 눈을 마주칠 수도 있다. 그와 짧은 눈인사를 하고 나면 왠지 정겨운 이웃 하나가 생긴 것도 같고, 상하이가 조금 더 좋아질지도 모른다.
#베이커앤스파이스 #커피는오직아메리카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