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편_ [Grains ]그래인즈 @우캉루(武康路)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는 생각보다 꽤 넓은 지역이다. 하지만 길 하나하나는 좁은 2~4차선 도로. 모든 길에는 약속이나 한 듯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초록잎들로 하늘 천막을 치고 있고, 기분 좋은 카페들이 속속 박혀있다. 프랑스 조계지를 산책하는 이라면 이 '카페로드'를 따라 걸어도 좋다. 여러 날을 두고 다른 길을 걸어보고, 또 다른 카페를 만나보아도 좋다. 모든 길은 좋은 카페로 통하고, 카페의 즐거움은 ‘그곳으로 가는 길’ 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니까.
12년 전 가을, 한 편의 영화가 보여준 낭만은 특별했다. 그것은 단순히 ‘로맨틱’이라고 번역되기 어려운, ‘어떤 풍경’을 우리에게 각인시켰다. 가을 햇살이 시작되는 어느 날, 두 남녀는 다시 만났다. 주어진 시간은 한나절.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아름다운 길에서, 길 위의 보석 같은 카페에서 그들은 걷고 마시며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영화 ‘비포선셋’이 선사한 낭만이란 한편 ‘그들이 놓인 풍경’이기도 했다.
요즘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의 길에는, 그때 각인된 풍경이 재현되고 있다. 오래되어 더 아름다운 건축물들, 반짝이는 가을볕을 밀당하며 보여주는 플라타너스 나뭇잎들, 기분 좋은 바람, 걷기 좋은 평지길, 그 길에서 조용히 향기를 뿜어내는 작은 카페들. 대화가 끊이지 않는 친구와 커피 한잔을 나눈다면, 셀린과제시의 기분을 느껴볼 수도 있겠다. 묻어두었던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있고, 어쩌면 마주 앉은 그(녀)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 제목처럼 ‘해가지기 전’ 한 나절 만으로도.
카페 Grains가 메인 메뉴라면 그곳으로 가는 길은 에피타이저다. 짧지만 충분히 산책을 돋우는 길. 후난루湖南路에서 우캉루武康路로 우회전을 하는 순간, 저 앞에서 짙은 청록색 작은 건물이 손짓을 한다. 한껏 열어 젖힌세 개의 큰 창문으로. 카페는 온몸으로 세상의 풍경에 귀 기울이고 있다. 안에 아름다운 공간을 품은 곳이 아니라, 스스로 아름다운 길의 일부가 된 카페다.
카페의 끝 쪽 작은 창구에는 요즘 상하이에서 유행하는 아이스크림을 맛보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다. 인스타용 유행 사진 따위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무리들에 보란 듯이 쿨하게 카페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주스보다는 커피가 좋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라면 더 좋다. 이 카페의 첫 번째 매력이 카페가 놓인 길이라면 두 번째 매력은 커피맛이니까.
좁은 실내에는 갓 뽑은 커피 향이 가득 차 있다. 창가에 커피를 두고 앉아 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온통 가을빛으로 물든 거리가 커피의 향을 닮았다. 창 밖 풍경 또한 이 카페의 인테리어다. 잠시 풍경에 영혼을 맡기고 모든 것을 놓아보길. 문득 시간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발걸음이 더디다. 잡지에서 본 적 있는 고급 자전거와, 오래되고 녹슨 자전거가 줄지어 달린다. 파마머리 아줌마와 파마머리 푸들이 함께 산책하고, 길 건너 담 위에서 고양이가 캣워크를 한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툭 튀어 오르는 질문, “나는 왜 그렇게 바쁘게 살고 있을까.’ 마치 속도를 제어할 수 없는 일상의 운전대에서 손을 놓아버린 기분이다.
회사가 있던 강남역 인근의 카페에 앉아 짧은 여유를 부리던 때가 있었다. 창 밖 사람들은 늘 바쁘게 움직이고, 주어진 시간이 다하면 나 또한 그들 사이로 빠르게 사라져야 했다. 카페를 나설 때는 늘 한숨이 났다. 밖의 속도에 발맞추는 것에 지쳐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다시 나가서 걷고 싶게 한다. 여유롭게 흘러가는 풍경의 일부가 되기를 권한다. 카페를 나서서 다시 걷는 우캉루의 길은 말하자면 디저트다. 가을색으로 물들인 담백한 디저트. 이 디저트를 즐기며 걷고 있노라면, 선뜻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마음에 내려앉을지도 모른다. 그 길의 낙엽들처럼.
* Tips.
- 주말보다 주중이 좋다. 비 오는 주중이라면 백 미터 줄을 서는 아이스크림을 3분 만에 맛볼 수도 있다.
- 영어로 주문이 가능하다. 가끔씩 ‘안녕히 가세요’를해주는 한국 유학생 출신 훈남 오빠가 있다.
- 화장실 세면대가 아름답다. 화장실에 갈 때 휴대폰을 들고 가도 좋다
- 커피를 마시다 한 번쯤 천장을 바라볼 것. 반짝이는 천창 너머로 플라타너스 잎이 진짜 인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