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nghai #80
나는 그 도시들의 시간에서 탈출해야만 했다
그때는 느리게 흘러가는 제주도의 시간이 싫었다.
시간이 정체된 섬에 내 인생은 담보 잡혀 있었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어설프고 막연한 존재. 어서 스무 살이 되어 섬을 탈출하면 새 인생이 펼쳐질 것 같았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서연이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내가 안다. 바다도 한몫했다. 이토록 넓은 땅이었지만 언제나 그 끝은 바다였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은 어떤 위대한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세계 같았다. 제주도의 여고생이라면 한 번쯤 느꼈을 감정이다. 그때의 모든 시간은, 바람은, 공기는, 내 인생은, 그렇게 느리고 답답하게 흘렀다. 만약 그 옛날이 아니라 '지금처럼 유행하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면 내 사춘기는 달랐을까.
제주도를 성공적으로 탈출한 지 이십 년이 지났다.
그동안 4년의 대학생활과 15년의 직장생활을 했다.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한다. 기가 막힌다. 사춘기 몇 년은 그리도 느리게 흘렀는데 이십 년 가까이의 시간은 모든 순간이 찰나다. 물론 성인의 삶이라는 게 그렇다. 20대의 시간은 시속 20km/h로, 30대는 30km/h로 산다는 말이 만고의 진리다. 여기선 '대도시'의 생활이 한몫했다. 특히 서울은 전 세계 어느 도시보다도 빠르게 흘러간다. 빠르게 생기고, 빠르게 성장해서, 빠르게 평가되고, 빠르게 결정되며, 빠르게 잊혀진다.
사람도 일도 예외가 없다. 서울에서의 내 삶이 그렇게 흘렀다. 나는 어느새 서울의 부장님이 되어, 누구보다도 서울의 시계에 맞춰 일했다. 빠릿빠릿하게, 착착, 쉴 틈 없이 재깍재깍. 서귀포의 여고생이 기대했던 생활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좋든 싫든 시계 속의 부품처럼 그저 매일 제대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객지 생활을 하는 생업자의 '서울 생활 제 1원칙'이다. 그리고 어느 날, 몸과 마음이 고장 나고서야 부품은 스스로 깨닫는다. 언제까지 빠르고 정확하게 '재깍재깍 돌기만 할 것인가.'
서울 시계를 탈출한 지 2년이 흘렀다.
공식적으로는 상하이에서 일하는 남편과 더 이상 떨어져 살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시계 속에서 각성을 시작해버린 나는, 부품으로서의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해야 했다. 빠르고 정확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시계를 빠져나온 부품이 다시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그런데 이런. 나는 더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 상하이에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 빠른 도시는 서울이 아니었다. 2년 동안 이곳의 변화를 복기해본다. 다시 기가 막힌다. 예전에 '스피시즈'라는 영화가 있었다. 지구인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외계인이 성장하던 속도. 그 시간의 속도와 견줄만하다. 이곳의 성장과 변화는 그만큼이나 빠르다. 여기서는 어떤 일이든, 어떤 취향이든 한번 눈뜨기 시작하면 그 영화의 외계인처럼 빠르게 성장한다. 그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면 누구도 이 도시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상하이 시내의 어느 카페에 앉아있다.
몇 달 전, 프랑스 조계지의 한적한 길에 들어선 곳. 바리스타 친구가 말하길, 상하이에서 가장 좋은 커피머신을 쓰고 있다고 했다. 일을 하다가 잠시 파일 창을 닫았다. 볕 좋은 창가에 앉아 플라타너스 나무가 늘어선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도시의 시간이, 순간 내 마음대로 느리게 흘러간다. 상하이의 스페셜티 커피 시장이 영화 속 외계인처럼 빠르게 성장하건 말건, 상하이에서 가장 좋은 커피머신이 여기 있든 말든 내게 이미 커피의 맛은 중요하지 않다. 이 도시에서의 성공도 중요하지 않다. 그나저나 '성공'이 대체 뭔데.
세상의 시간과 나의 시간을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예전의 나는 해 본 적이 없다. 서두르지 마라. 여유를 가져라. 는 말들을 나는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했다. 모두 한가한 소리였다. 그러나 두 번의 도시 탈출을 하고서야 비로소 나만의 시간을 설정해본다. 지금부터의 삶은 0시 0초부터 다시 시작. 한때 도시의 부속품이었던 내가, 어떤 새로운 무엇이 될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여전히 불안정한 삶. 어디에도 정착되지 않은 삶. 하지만 어차피 어느 곳에 정착했어도 불안했을 삶. 생각해보면 내가 원래 그렇고, 인생이 본래 그러하니까.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세상의 시간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시계에 발 맞추기로. 언제부턴가 혼자 중얼거리며 다짐하는 말이 있다. 나는 나대로 가면 된다. 내 인생에 더 이상 대단한 목표 알람을 맞추지도 않겠다.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촘촘하게 기억할 수 있을 만큼 흐르는 시간을 느껴볼 것이다. 오늘 낮, 하얀 벽에서 볕이 서서히 물러서던 그 시간들처럼.
여전히 모든 것들이 빠르다. 모두가 빠르게 얻고, 빠르게 잃고, 빠르게 잊는다. 내 사춘기의 도시, 그 섬도 더 이상 더디게 흘러가지 않는다. 이제 나는, 다만 내 시간만을 어루만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옛날 나의 고향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조금 답답하고 조금 느려도.
나는 나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