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잘 쓸 것인가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글짓기반이 아니라 합창반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나는 늘 합창반 옆, 글짓기 반 교실에 앉아 있었다. 방과 후면 글짓기반으로 가서 지루하게 앉아 산문을 썼다. 글을 쓰는 내내 옆 교실 ‘합창반’에서는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흘렀다. 저 목소리들 중 하나가 되고 싶다. 몸에 꼭 맞는 단정한 유니폼을 입고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나도 노래하고 싶다. 하지만 남의 떡이었다. 엄마는 시립합창단의 단원이자 성가대 단장이면서, 내가 합창반이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너는 글 쓰는 걸 더 잘해. 그냥 산문반에 있어. 엄마의 단호한 지령은 초등학교 6년 내내 이어졌다. 유니폼을 입은 아름다운 목소리들이 학교 강당이나 YMCA 같은 곳에서 공연 혹은 연습을 하는 주말에, 나는 늘 백일장에 나갔다. 금은동상 혹은 장려상장이 나를 위로했지만 내 마음은 늘 합창반에 있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삐딱한 유전자가 발현되기 전이므로 나는 묵묵히 백일장에 나갔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나는 이미 ‘산문반 아이’였다. 그러던 중, 운 좋게 대통령 상을 받게 되었다. 제주도 서귀포의 작은 학교로 대통령님께서 하사하신 상장과 메달이 도착했다. 대통령 상을 받은 아이들의 글을 모아 책을 만들어 주신다고도 했다. 책 제본비 5만 원만 내면.
네 자매를 힘겹게 키우는 엄마가 단돈 5만 원으로 고심하고 있을 때, 나는 빠른 결정을 내렸다. 내가 산문 또 써서 다음에 다시 상 타면 돼. 상장과 메달이 있으니까 책은 필요 없어. 내가 어떤 글을 써서 대통령님의 마음에 들게 했는지 지금까지도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는 오랫동안 ‘5만 원 주고 그냥 책 만들 걸 그랬다’ 고 작은 소리와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엄마는 쓰디쓴 침을 소리 없이 삼켰다. 나는 이후로도 큰 아쉬움 없이 산문을 계속 썼다. 내 쓰디쓴 마음은 오직 합창반만을 향해 있었으니까.
대학생이 되자마자 ‘노래패’라는 곳에 들어갔다. 엄마의 허락 없이, 말하자면 ‘학과 중창반’이 되었다. 곱고 단정한 유니폼 대신에 개량 한복 같은 것을 입고 공연했다. 내 목소리가 다른 이들의 목소리와 화음을 이루며 울려 퍼질 때, 나는 인생의 작은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의 노래패에는 흔하게 받던 상장도, 대통령님이 주는 상도 없었다. 다만 원 없이 노래했다. 어릴 적 쓰디쓴 마음 같은 건 3년의 노래패 생활로 씻은 듯이 사라졌다.
졸업 후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어려운 선택이었다.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이미 광고회사의 ‘기획자’로 입사한 지 일주일 후였으니까. 일주 일째 밤새워 기획서를 작성하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은 기획이 아니라 ‘카피를 쓰는 것’이었다는 걸. 일주일 만에 퇴사를 하고 카피라이터로 다시 취업에 도전했다. 카피라이터가 되기 위한 어떤 전문 과정도 없었다. 쓰는 거라면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막연한 자신감을 준 것은 어린 시절 엄마의 단호한 결정 덕분이었다. 하지만 자신감과 달리 카피라이터로 살아가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산문 실력과 카피라이팅의 능력이 같을 리 없었다. 매일 밤을 새우며 고등학교 시절 깜지를 채우듯이 카피쓰는 연습을 했다. 처음 내게 주어진 미션은 S회사 프린터 광고. 그 브랜드의 기업 RP 광고를 만드는 데 스프링 노트 한 권을 다 썼다. 16년 전의 일이다. 카피도 제대로 못 쓰면서 키보드를 타닥타닥 치는 게 죄스러워 내내 공책에다 끄적거렸다. 지금은 키보드를 안 쓰는 일을 상상할 수도 없지만. 신입 카피라이터 시절, 내게 ‘광고 카피를 쓴다는 것’은 인생의 전혀 다른 도전이었다. 도전은 16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나는 지금 중국어를 쓰고 산다. 뜻하지 않게 시작된 새로운 도전. 상하이에 살게 되었다. 지겹도록 말하고 쓰던 언어가 아닌 낯선 언어가 일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 버렸다. 하나씩 배우면 될 것이었다. 언젠가처럼 깜지를 채워가면서 말이다. 문제는 내 직업이었다. ‘한국말을 쓰는 것’이 내 직업의 유일한 조건인데, 그 단 하나를 나는 잃었다. 중국어를 아무리 공부해도 중국 소비자의 마음을 통찰할 수 없고, 중국의 문화를 뼛속 깊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국어로 광고 카피를 쓸 수가 없다. 혹자는 무엇이든 배워서 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16년 차카 피라이터가 할 만한 도전은 아니다. 나는 배울 연차가 아니고, 내 능력을 술술 써야 할 연차니까.
직업을 잃은 대신, 시간을 얻었다. 오랜 기간 뇌와 몸을 쓰는 고된 직장인으로 살았다. 척박한 직장생활을 하면서 잃어버린 인간성과 건강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고단한 날들이었지만 16년의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렀다. 일을 하며번 돈을 나는 어딘가 복수하듯이 쓰곤 했다. 어렵게 번 돈을 쉽게 쓰면서 밤새 일하는 날들을 위로했다. 지금은 새롭게 주어진 소박한 시간을 쓴다. 중국어를 배우고, 운동을 하고, 새롭고 작은 일들에 도전하면서. 따박따박 월급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따박따박 아침 해가 뜬다. 내가 마음껏 자르고 편집해서 쓸 수 있는 하루하루가 들어온다. 돈을 쓰는 것만큼 순간의 쾌락을 주지는 않지만긴 보람을 주는 소비다. 덕분에 ‘삐딱한 유전자가 발현되기 전’의 산문소녀 성격도 어느 정도 회복했다. 생전 써보지 않던 몸을 써보며 걷고 뛰고 페달을 밟아 본다. 다음 달에는 기타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조만간 상하이의 어느 성당에 가서 성가대도 기웃거려볼 생각이다.
나는 산문을 쓰고, 목을 쓰고, 카피를 쓰고, 월급을 쓰다가, 어느덧 시간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언제까지 이 느긋한 시간을 쓸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주어진 ‘오늘 하루를 잘 쓰는 것’에 집중하기로 한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쓰기'란 그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