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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Feb 13. 2018

자기계발 중독자의 새해

우리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중국인 Mary는 스페인 회사에 다닌다. 회사에서는 영어로 일하지만, 스페인 회사여서 미래를 위해 스페인어를 배운다. 그 와중에 모국어 중국어를 (가르칠 정도로) 잘해서 일주일에 세 번씩 외국인들에게 중국어 과외를 한다. 수업은 출근 전 새벽. 선생도 학생도 미쳤다. 그 새벽에 왜.


평일 저녁엔, 주 5회 요가 수업을 받는다. 출퇴근은 자전거로 한다. 언젠가 그녀의 허벅지를 만져봤는데 통나무인 줄 알았다. 출퇴근 자전거도 모자라 일주일에 세 번씩 러닝을 한다. 언젠가는 그렇게 쌓은 실력으로 마라톤대회에도 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식인종이라면 그 다리는 먹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기타를 배운다. 프사는 기타 치는 사진, 피아노도 배우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주중에는 요가와 러닝을 하기 바쁘고 주말에는 대학원에 다니기 때문이다. 토, 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시간 거리의 대학원에 꿀 주말을 모두 바친다. 그러더니 며칠 전에는 광동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며 선생님과의 사진을 보내왔다. 아니 너는 커서 ‘인간 번역기’가 되려는 거니. 주말에는 좀 쉬어!


며칠전엔 새해엔 좋은 남자 친구가 생기길 바래! 흔한 새해 인사를 보냈다. ‘그럼 새해엔 외모도 이뻐지고, 내적인 아름다움도 더 쌓도록 노력할게!로 답문이 왔다. 아니 또 노력해? 뭘 더 노력해. 그만 노력해. 지금도 충분히 이쁘고, 지금도 충분히 노력하고 있어. 4개 국어를 도전하고 식인종은 관심 없을 탄탄한 근육질 다리를 가진 그녀가 무엇을 더 노력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새해엔 그만 노력하고 좀 천천히 가자.라고 메시지를 보냈어야 했다. 30대 초반의 메리는 진짜 무엇이 되려는 걸까. 저스티스 리그나 어벤저스에 이력서를 넣으려는 걸까. 다음 주에만 나서 진실을 알려줘야겠다. 너는 중독자야. 자기계발 중독자.




나는 요즘 주중 오전 5회, 주말 1회의 어학수업을 듣는다. 올해부터는 불어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덜 떨어진 내 중국어가 코로 웃네. 쉬고 앉아있던 내 영어가 입꼬리로 웃네. 하지만 어차피 외국어는 취미로 하는 것이고 통역사가 될 것도 아니니 불어에도 발만 한번 담가보기로.


그래서 그런가, 사실 어릴 때부터 입만 살았다는 이야기를 줄곧 들어와서, 최근에는 몸도 좀 살리고 있다. 난생처음 시작한 스피닝 바이크가 생각보다 수업빨이 잘 받아서 필라테스와 함께 주 1회 수업을 더 늘려보기로 했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나면 온갖 잡생각이 없어진다. 특히나 눈을 감고 바퀴 스피드를 100으로 돌리고 있으면 내 다리가 바퀴를 돌리는 것인지, 다리가 신에 들려 미쳐 돌아가는 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그날 밤에는 잠도 잘 온다.


나도 기타를 배운다. 수업은 주 1회. 하지만 어떤 공부보다도 힘들다. 하루에 한 시간 이상씩 개인 연습을 해야 하니까. 개인 연습을 하지 않고 수업에 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사실상 기타 수업이라는 것이 무엇을 배우러 가는 것보다는 연습한 내용을 검사받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악기 연주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다양한 명곡이 함께하니, 시간이 즐겁게 가서 할 만하다. 이렇게 1년쯤 지나면 단단한 개구리 손가락이 되어 고통 없이 안정적인 소리가 나지 않을까.


일주일에 3일은 상하이의 구석구석을 뒤진다. 좋은 풍경,  좋은 공간, 좋은 카페, 좋은 길들을 사진으로 담고 기록한다. 일 때문에 시작한 건데, 일 년 정도 하다 보니 좋은 기록집이 생겼다. 이 일을 유지하는데도 시간이 꽤 든다. 하지만 한국에서 친구들이 가끔씩 찾아오면 좋은 가이드북이 돼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상하이 토박이들에게도 좋은 곳들을 소개해주곤 한다. 기록집의 제목은 ‘언제까지 상하이에 살지 몰라서’. 인생 말년에는 좋은 추억집도 되겠지.


일주일에 이틀은 브랜드 업무에 쓴다. 하루는 잡무, 하루는 종일 회의를 한다. 이틀 정도의 시간만으로도 이 브랜드가 유지될 만큼 안정되었기도 하고, 미쳐 돌아갈 만큼 대박이 나지도 않았으니까. 그래도 최근에 BMW와의 콜라보를 잘 마무리해서 좋은 포트폴리오가 생겼다. 힘들 때쯤 한 발씩 나아갈 힘을 얻는 걸 보니, 아직은 더 나아갈 때인가 보다.


그리고 때때로 카피라이터로서의 업무를 한다. 수업하고 운동하고 일하는 중간에 틈틈이 아이디어와 카피를 생산한다. 이러다 보니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이 줄었다. 의도적으로 줄였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줄었다. 안 쓰던 몸을 쓰니 밤샘이 예전 같지 않다. 생전 안 하던 '책 붙잡고 졸기'도 한다.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열려다가 기타를 잡을 때도 많다. 기타 줄을 튕기면 아직도 서툰 삑사리가 심정을 어지럽힌다. 지금 한가하게 책이나 읽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코드를 읽어라.


이런 패턴으로 내 일상은 촘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메리와 새해 인사를 나누던 작년의 마지막 밤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멀더에게 말했다. 자기야, 메리는 자기계발 중독인 것 같아. 미쳤어. 애가 쉬지를 않아. 순간 어이가 없다는 표정. 자기나 줄여. 지금 누구한테 뭐라는 거야.


그런가? 내가? 아, 어쩐지 밤낮으로 피곤하더라니. 스트레스가 없는데 왜 이럴까 의아했다. 감기도 연달아 두 번씩이나 걸렸다. 열심히 몸 관리를 하는데 왜 아픈 건지 이상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마음이 편한 적이 없는데? 잡생각도 안 나고 무기력해지는 기분도 다 없어졌는데, 왜? 그러고 보니 주말 하루도 쉬는 날이 없네. 일찍 자는 날도, 늦게 일어나는 날도 없네. 시간을 잘 써보려고 했던 건데. 상하이 생활을 보람차게 해 보려던 건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조바심이었다. 나는 능숙하게 시간 계획을 했다 생각했지만, 조바심을 내며 시간을 난도질했을 뿐이었다. 갑자기 메리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내가 상하이의 시간들이 공허하게 흘러갈까 불안했던 것처럼, 메리도 그녀의 삼십 대가 그렇게 흘러갈 것을 두려워한 건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메리를 만나고 싶었다. 메리야 우리 이러다 큰일 나.


몸을 이렇게 공장기계처럼 돌리다가는 고장 난다. 오래 못쓴다. 마음 편하자고 몸을 너무 혹사한다. 우리 안의 불안은 몸의 혹사로 잠시는 좋아지겠지만 속도 조절도 해야 한다. 이제 그걸 배워가자고. 수업이나 운동은 조금 줄이고 말이야.

며칠 전 한국에 다녀와서 메리를 만났다. 아니나 다를까 요즘 데이트 중인 썸남이 있는데 진행이 순탄치 않다. 그녀의 프랑스인 썸남은 너무 바쁘셔서 약속을 매번 한 시간 전에 취소하곤 특별한 사과도 없다. 이건 좀 아닌것 같은데, 만나면 또 너무 잘 맞고 재미있어서 섣불리 관두자기도 쉽지 않다고. 무엇보다도 자꾸만 ‘다시 시작’ 해야 하는 연애라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새로 배우는 광동어에 더 집중해볼까 한다고 했다. 자신의 내면을 더 단단하고 아름답게 가꾸면 더 좋은 사람이 생기지 않겠냐. 나는 그건 아닐 거라고 했다.


메리야 우리는 불안한 거야. 지금의 우리에 대해서. 채찍질을 멈추고 좀 쉬어 보자 우리. ‘그러게 썸남이랑 순탄하지 않은 것도 내 문제일까? 내가 너무 조바심을 내서?’라고 메리가 물었다. 아니, 그건 누구의 문제도 아니야. 너에게 좋은 남자는 너를 불안하거나 조바심 나게 하지 않아. 그저 그 사람이 네 사람이 아닌 거야. 짧은 점심식사가 끝나고 회사로 돌아간 메리에게서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나는 메리와 이야기를 나누고서 복귀하려던 어학수업을 조금 더 미뤘다. 기타 연습도 이틀에 한 번으로 바꿨다. 대신 책 읽는 시간과 잠을 좀 더 늘렸다. 감기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메리는 여전히 운동과 어학수업과 대학원을 병행한다. 하지만 썸남은 마음 편하게 정리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상하이 어느 TV 채널이 선정하는 ‘30대를 대표하는 여성’으로 뽑혀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보내온 인터뷰 사진 속 메리는 아름다웠다. 그녀는 나보다 더 지독한 중독자지만, 반드시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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