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의 수상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바야흐로 ‘아아’의 계절이다. 찬 음식이나 찬 음료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거의 모든 날에 ‘따아’를 마신다. 하지만 여름, 땡볕을 걷다 들어온 카페에서는 도저히 ‘따뜻한’ 아메리카노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방금 나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면 마치 다시 태어난 듯 온몸이 새롭게 작동한다. 땀 흘리는 보행자의 심신을 단번에 진정시켜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어쩌면 한여름, 커피의 모습으로 내려온 신이다.
문제는 10분 뒤에 온다. 내 몸은 선천적으로 냉기를 품고 있어, 에어컨 바람 앞에 서면 크립토나이트를 만난 슈퍼맨이 된다. 추위에 잔뜩 소름이 돋은 팔은 점점 핏기를 잃어가고, 코에서는 맑은 물이 화수분처럼 샘솟는다. (물론 대부분의 고객님들은 내가 맛보는 지옥을 ‘시원하다’ 혹은 ‘살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내 손이 덜덜 떨려서 노트북 타이핑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면, 결국 그것을 원하고야 만다. 역시 뜨거운 아메리카노였어! 이것이 한결같은 나의 '여름 아메리카노’ 딜레마. 중국집 ‘짬짜면’처럼 아아와 따아를 반반으로 파는 곳이 있다면, 나는 그곳에 여름 한 계절을 바칠 수도 있었다.
그날도 약속 장소 스타벅스까지 20분을 걸었다. 상하이는 36도. 이상하게도 걸을 때는 괜찮다가 꼭 시원한 곳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땀이 줄줄 흐른다. 그럴 때면 카페에서 10분 뒤 튀어나올 변덕 같은 것은 안중에 없어진다. 땡볕에 복수하듯 아이스를 마실 테다. 주문 줄에 서서 흥분한 황소처럼 신발로 바닥을 긁고 있었다. 내 앞의 한 명만 주문을 마치면 내 차례! 그때 앞 여자가 차분히 말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얼음은 빼 주시고요” 뭐요? 귀를 의심했다.
내가 이 정도 중국어를 잘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아이스’를 빼 달라니,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땡볕에 이 언니도 정신을 잃었나, 아님 아이스와 핫을 구별 못하는 것인가. 하지만 내 앞의 언니는 차분했고, 더 놀라운 것은 주문을 받은 직원의 태도였다. 옙!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얼음 빼시고요, 뭐 다른 건 더 필요하지 않으세요? 라니. 이건 마치 커피 한잔 주시고요, 커피는 빼 주세요 같은 이상한 말이 아닌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심정으로 서 있다가 얼떨결에 본능이 주문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10분 후 역시 냉지옥을 맛보았다.
그런데 또 며칠 후, 이번에도 똑똑히 들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얼음 빼 주시고요. 아니 정말 그런 게 있단 말인가! 그럼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님 말고 심정으로 그 말을 꺼내 보았다. 마치 원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네네 고객님,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얼음 빼고요, 상온 커피면 되시겠어요? 아 네!! 그러니까 이 이상한 주문은 분명, 여기 상하이의 카페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얼음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쭉 빨았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딱 중간의 커피. 얼음이 가득찬 것은 너무 차갑고, 뜨거운 것은 말 그대로 너무 뜨거운 것이니 중간은 어떨까요? 라고 누가 제안이라도 한 것처럼. 그것은 내 몸에 원래 들어있었던 액체처럼 위화감 없이 쑥 빨려 들어갔다. 10분이 지나도 그것은 여전한 상온의 커피, 카페 안의 냉기와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온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켰다. 내 입장에서는 아아와 따아 사이의 ‘중도’를 아는 지혜로운 커피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안했을 '니맛도 내맛도 아닌 중간커피'. 그런데 상하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이상한 주문을 하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이들에겐 아주 오래된 ‘차 문화’가 있었다. 상하이 친구들은 나이가 어린 사람들도 ‘차가운 것은 몸에 좋지 않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찬 음료가 싫은 이들은 언제 어디서든 따뜻하거나 미지근한 상온의 음료를 즐겨 마신다. 심지어는 맥주도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 물방울이 송송 맺힌 것보다는 박스 안에서 꺼낸 상온의 것을 더 좋아한다. 언젠가 시내에서 맥주집을 하는 상하이 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상하이에서 ‘차가운 맥주’를 마시는 사람은 딱 두 종류야. 미국 사람이랑 한국 사람. 여기서는 많은 사람들이 미지근한 상온 맥주를 마시지. 그러니까 그때 들었던 그 말은 맥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찬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의 문화와, 선천적으로 찬 음식을 못 먹는 나의 문화는 위대한 교집합을 찾았다. 바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 빼고’라는 전혀 아이스 하지 않은 아이스커피로. 그게 무슨 변태 같은 맛이야!라고 혹자는 말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상하이의 그 변태 같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좋았다. '처음과 달리 얼음이 녹아 점점 맹맹해지지도', '뜨겁던게 서운하게 식어버리지도' 않고 첫 모금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한결같은 온도로 편안한 커피다. 상하이에 사는 한국 친구들에게 이 '수상한 주문'을 설명했더니 그들은 그게 뭐야! 라며 얼굴을 찡그렸다가 이내 이곳의 문화를 이해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겠네. 이들은 찬 걸 싫어하니까. 그치만 여기 사람들도 땡볕에 걸어와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역시 싫을 거야. 현명하네. 하하.
요즘도 땡볕을 걷다 들어간 카페에서는 ‘아이스 없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종종 주문한다. 이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니 내 몸이 한결 편해졌달까. 상하이에 3년을 넘게 살았지만, 아직도 많은 것들이 낯설다. 그리고 낯선 것들을 한발 더 안쪽으로 넘어가 찬찬히 들여다보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이고,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해 속에는 분명 이 곳 생활의 더 좋은 솔루션들도 숨어있다. 내 앞의 여자가 이상한 주문을 했을 때, 저런 이상한 소리가 어딨어.라고 한번도 도전하지 않았다면, 내 몸에 이토록 잘 맞는 커피는 쥐어지지 않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