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필소녀 Jan 23. 2019

우리 관계는 포스트잇일까 딱풀일까

어른이 될수록 떼기가 쉽다


"너는 포스트잇 같은 사람이었어." 그 후배를 만나면 그렇게 말하곤 했다. 서운함과 질투와 비난이 묘하게 섞인 말투였다. 나한테 너는 딱풀 같은 존재였는데 말이야. 이 말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딱풀까지 꺼내 놓으면 내가 너무 질척거리는 것 같아서.



회사에서 만났지만 친동생처럼 여기던 후배였다. 매일 회사 안에서 무수한 전투를 함께 겪으며 끈끈한 ‘형제’가 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서로 회사를 옮긴 후, 새 회사에서 그는 또 다른 형제를 만들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지금은 생각하지만, 그때는 ‘누구에게나 잘 붙고 잘 떨어지는’ 포스트잇 같은 그가 못내 서운했다.


그러는 선배는 어떤 사람인데. 그가 묻자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딱풀 같은 사람이지. (너처럼) 여기저기 붙었다 떼였다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번 붙으면 잘 떼기 어려운, 떼어도 자국이 남는 그런 사람. 이 말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내가 이후로도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잘 지낼 때면 그에게서 ‘포스트잇 같은 사람’이라는 비난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포스트잇과 딱풀이란 사람의 유형이 아니라 관계의 유형일 뿐이라는 건, 직장 생활을 오래 하면서 알게 되었다. 잘 붙었다가 아무런 흔적 없이 떨어지는 관계도 있고, 별생각 없이 풀을 발랐다가 떨어지지 않거나 혹은 떼어도 오래 자국이 남는 관계도 있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포스트잇이기도, 딱풀이기도 했다. 그리고 ‘관계’라는 건, 서로를 떼어내기 전까지는 포스트잇인지 딱풀인지 잘 알 수 없었다.



회사를 떠나보면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인간관계’인데, 회사와 동시에 한국을 떠난 나는 이 선명한 ‘정리’를 한 번에 겪게 되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 나름의 결과지를 받았다. 어떤 관계가 포스트잇이었는지 딱풀이었는지 예상한 것도, 예상치 못한 관계도 있었다.


회사에서 매일 희로애락을 함께했지만 그저 잘 살고 있을 거라고 믿으며 연락하지 않게 된 사람들이 있고, 가끔씩 커피 한잔을 하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여전히 그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사람들도 있다. 몸을 담았던 회사와 나라를 떠나 수년이 지나고 선명한 결과지를 손에 쥐고서야 나는 생각한다.



관계에 있어 포스트잇과 딱풀이란 양자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밸런스의 문제라는 걸. 만일 지나온 관계가 모두가 딱풀이 되었다면 내 인생은 덕지덕지 상처투성이였을 것이다. 혹은 모두가 포스트잇이었다면 너무도 산뜻하고 허망한 백지가 되었겠지. 더러는 얼룩지고, 더러는 깨끗이 떨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인생이다. 포스트잇의 ‘참을 수 없는 산뜻함’에 상처 받지 않고, 딱풀의 ‘손톱으로 다 긁어내고 싶은 자국에’ 더 이상 후회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어른이 되어간다.



너무 어른이 되어버렸는지, 마음에 어지러운 흔적을 주지 않는 포스트잇 같은 관계가 때론 편하다. 어쩌면 인생을 평화롭게 만드는 건 그런 관계다. 특히나 타국의 생활은 더욱 그렇다. 해외생활에서는 들고 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에 적응하지 않으면 마음이 많이 다친다.(혹은 닫히거나.) 내게 중국어만큼이나 여태 제대로 학습되지 않는 몇 가지 일 중의 하나다. 하지만 반면에 몇 안 되는 딱풀 같은 관계들이 이 생활을 지탱해준다. 마음이 맞는 이들과 서로 끈적이는 풀을 발라 마음이 붙어있으면 웬만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돌아보면 타국이 아닌 자국에서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포스트잇이라고 불렀던 후배와 얼마 전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그를 알게 된 지 거의 20년이 되었다. 그는 상하이에서 서울보다 먼, 베이징에 살지만 여전히 서울의 무엇들보다도 가깝다. 살다 보면 어떤 딱풀은 본드가 되기도 하는가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삶의 방향을 조정하는 사소한 대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