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필소녀 Dec 18. 2018

20년 일했는데, 그다음이 없다

어른의 그 다음 세계

‘20년 일하고, 그다음이 없네요’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오랜 시간 광고회사에서 일해온 어느 국장님이었다. 며칠 휴가를 다녀온 그에게, 연말 개인평가 점수가 메일로 도착했다. 회사는 알파벳 한 글자로 간결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래도 회사를 더 다닐 테냐. 국장님은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그와 한 회사에서 수년 동안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그의 업무태도나 능력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누구보다도 스마트하고 합리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조직이란 업무 능력과 크게 상관없는 역학관계가 작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의자는 당연히 줄어들고, 남은 의자에 앉을 자격은 더욱더 까다로워진다.


떠날 때가 되었다고 그는 또 말한다. 그런 생각을 한 지는 꽤 되었다. 다만 수년째 '그다음'을 계획하지 못하고 있다. 직장생활 20년은 한 인간을 어떤 특정한 형태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그것은 내가 경험했다. 15년 정도 직장을 다닌 후 나는 ‘시스템 없이는 아무것도 혼자 해낼 수 없는’ 반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 있었다. 조직이라는 시스템이 환경을 제공해 주고, 앞도 뒤도 보지 않고 달리다 보면 어느새 수동형 인간으로 15년 20년. 달리는 중간에 '그다음'을 알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내가 일하는 상하이의 공유 오피스 낮의 풍경


상하이 생활은 어때요. 그는 늘 묻는다. 그것은, ‘조직을 떠나 사는 것도, 살아갈 만합니까’라는 질문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회사를 떠나고, 한국을 떠나고 벌써 이곳에서 4년째 살고 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다. 그가 궁금해하는 ‘다음’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그 ‘다음’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다음’의 세계로 넘어가기 위한 준비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었는데, 현재를 함께 달리던 이들은 그렇게 함께 어리석었다. 심지어 다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현재의 일에 충분히 몰입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당연히 ‘다음’이 보이지 않겠느냐는 막연하고 낭만적인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낭만적인 다음'이란 없다. 누구든 ‘이렇게 준비됐어’의 다음을 맞고 싶겠지만, 사실상 대부분은 ‘어떻게든 되겠지’의 다음을 맞는다. 특별한 준비 없이 상하이로 떠난 나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시작하는 다음에는, 직장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막막함과 무기력이 따라온다. 나의 경험이지만 누구든 겪게 될 일이다.

밤에도 퇴근하지 않고 일하는 공유 오피스의 사람들

나는 여전히 시행착오 중이다. 직장생활 초반에는 그 세계에서 인정받고 빛나기 위해 매일 밤을 갈아 불씨를 틔웠다. 그리고 15년 그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도록 힘껏 바람을 불고 밤을 태웠다. 하지만 조직을 떠난 ‘그다음’의 세계에서는 어쩐지 불씨가 잘 틔워지지 않는다. 혹여 작은 불씨가 생겨도 곧 꺼지고 마는 기분이다. 언제쯤이나 돼야 불이 제대로 붙을지 여전히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불씨를 계속 틔워본다.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언젠가는 활활 타오르는 불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얼마 전 뉴욕의 광고회사에 다닌다는 이가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회사의 동료가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는 불과 30대 초반이라는 것이었다. 은퇴를 준비하는 이의 생각은 명료했다. 인생은 더 이상 하나의 직업만으로 끝나지 않으니, '은퇴'란 삶의 뒤안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두 번째 직업’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20대 중후반에 첫 직업을 갖기 위해 스무 살부터 학위와 자격증을 따놓은 것처럼, 두 번째 직업에도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준비하는 7년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30대 초반, 경제적인 준비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료의 생각을 듣고 '아트 디렉터'인 그 친구도 은퇴 준비를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다음의 세계를 하나도 준비하지 못하고 나왔으니, 내게도 아직은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대학에 들어가고, 휴학을 하고, 각종 알바를 하고, 복학을 하고, 인턴생활을 거치는 동안에도 늘 불안했다. 낯선 세계에 정착하여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며. 본래 무엇이 제대로 되기 전의 시기는 늘 그렇다.


저도 올해는 버리기로 했어요. 여러 가지로 노력했는데 생각대로 잘 안되었거든요.라고 자조하며 말했지만 우리는 오랜 직장 생활로 알고 있다. 공들인 시간은 적어도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만 국장님이 자신의 '그다음'을 위해 지금이라도, 조금이라도, 준비하시기를 바란다. 올해의 인사평가 점수 같은 것이야말로 알고 보면 인생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