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제주의 힙이다
'있어빌리티'
광고대행사에 다니며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다.
광고주는 물론이고 팀장까지 신앙처럼 떠받들던 말.
좋은 브랜드든 아니든, 광고 견적이 많든 적든,
백만원짜리 모델이든 10억의 빅모델이든,
카피가 한 줄이든 열 줄이든,
결과물은 무조건 고급스럽게,
'있어 보여'야 한다는 것.
무조건 무조건이다.
있어빌리티.
그것은 법이고, 룰이고, 제작의 불문율.
개인의 능력이자, 조직의 톤앤매너.
언젠가부터 모두가 그것을 향해
굶주린 좀비떼처럼 미친 듯 달려갔다.
모든 창작자의 먹이가 된 있어빌리티는
그렇게 어느샌가, 너덜너덜 뜯기고 질려버린
차가운 고깃덩어리로 전락했다.
있어빌리티가 식상해진 좀비떼들은
다시 뜨거운(핫한) 맛을 보기 위해
'없어보이는데 그래서 있어보이는'
변종 고깃덩어리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힙'이라 불렀다.
제주에 돌아와 살며, 놀란 것이 있었다.
차로 돌아다니면 곳곳에서 눈에 띄는
가게 간판 위의 놀라울 정도로 직설적인 이름들.
처음엔 웃겼다. 그런데 계속 보니
일리가 있네. 잊을 수가 없네.
그러다 중독되고 말았다.
내가 살던 논현동의 간판에선 특히
프랑스어, 이태리어, 스페인어를 많이 썼다.
뜻을 알든 모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알 놈은 알고, 올 놈만 오면 되니까.
그런데 제주는 달랐다.
이름이 일단 직관적이다.
가게의 정체성이 정확히 담겨있다.
타겟이 명확하다. 컨셉이 분명하다.
처음엔 '이름이 저게 뭐야 ㅋㅋㅋ' 했다가
결국에는 그 집을 찾게 되는 마성의 간판.
예를 들면,
동네 노인들 새치 하나는 꽉 잡았다
'새까망미용실'
골린이의 심정을 그대로 담은
'골때려 골프'
밥차리기 싫으면 여기로와
'밥촐림' (밥차림.의 사투리)
농어민 수당 신청하면 칼국수 말아줄 것 같은
'면사무소' (칼국숫집)
황금 마사지라도 받나
'만수르샵' (체형관리샵)
요리도 그렇게 됩니까
'뚝딱뚝딱 키친스'
구워볼게요.라는 뜻의 제주사투리
'구우쿠다' 쿠키점
이 외에도
'힘스포츠 운동센터'
'남정네들 포장마차'
'못생김 소품샵'
'밥깡패'
'꼬슬랑'_미용실
'김공주 헤어샵'
'뽕끌랑'(배가 뽈록 나왔다는 뜻의 제주 사투리)_마카롱 가게
...
내가 아직 못 만난 이런류 이름들이
제주에는 차고 넘칠 거라고 확신한다.
물론 영어로 '있어보이게' 지은 이름도 많다.
하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야자수 나무처럼 툭툭,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이름의 가게들이 등장한다.
아무도 웃지 않는다.
새까망하게 만들고
뚝딱뚝딱 해치우고
공주 만드는데
다들 진심이니까.
늘 그래왔으니까.
'있어보이'지는 않아도
솔직하고 자연스럽다.
'억지로 어떻게 보이려는 것은'
결국 더 없어보이는 법이다.
처음엔 어딘가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뽕끌랑'의 마카롱은 정말 그 의미처럼
'배가 터질정도'로 크고 맛있다.
조카가 좋아해서 종종 산다.
한라산도, 바다도, 오름도, 카페, 맛집도
제주의 매력이지만,
살다 보면 다른 재미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간판을 만날 때마다 혼자 씨익 웃는다.
몰랐던 제주의 맛이 쏠쏠하다.
서울에는 없는 제주의 '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