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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Mar 20. 2016

[위플래시]

[Whiplash]

그런 믿음을 가질 때가 있었다.

우리 세계의 사람이라면 '타고난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어린 연차일때 믿음은 더 강했다.


신입사원시절에 나는, 그 '타고난 무엇이 내게 있음'을 끈임없이 증명하려고 했다.

나의 아이디어가, 나의 카피 한줄이, 사수와 팀장의 눈을 관통하여 그들의 심장 한쪽에 박히기를.


그들이 나를 트레이닝하는데 쏟는 시간과 의지가 사라지지 않기를.

내가 그들의 곁을 스쳐가는 이름없는 부사수 중 한명이 되지 않기를.


그래서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매우 날카로웠다.

그들의 평가는 나를 절벽 끝으로 내몰기도 하고

때론 그 절벽 끝에서 날아오르게도 했다.



'자신에 대한 증명'은 당연히 노력의 단계로 넘어간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좋은 원석'도 세공이 되지않으면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곧 알게된다.


남다른 생각, 남다른 아이디어, 남다른 카피를 써내기 위해

드럼 스틱을 잡은 손에 피를 내는것같은 시간들이 필요하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노력'이란 단어를 실감하던 때였다.

고3때도 해보지 않았던 '자발적 밤샘'을, 나는 회사에 들어가 카피라이터라는 명함을 달고 시작했다.


그때 내가 플래쳐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앤드류처럼 그의 인신공격적 독설을 어금니에 심고 밤새 키보드를 두드리는 악바리가 되었을까.

혹은 그가 준 상처에서 허우적거리다 일찌감치 이 길을 포기했을까.

아니면 그의 방식을 부정하며, 내 자신을 믿고 나만의 길을 걸었을까.


어린 연차들에게, 사실상 3번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자신을 믿을만큼 자신을 알지 못한다.

플래쳐가 너는 병신.이라고 하면 병신이 되고, 

너는 천재.라고 하면 천재가 되는 시기다.



다행이었다고 해야겠다.

나에게 직접적인 플래쳐는 존재하지 않았다.

(플래쳐가 말하는)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두 단어 "good job"을 오히려 자양분으로 삼고 

나는 어느새 부장 카피라이터가 되어있었다.

물론 '찰리 파커'같은 카피라이터가 되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한 인간의 '광적인 노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세계에는 꽤 많은 플래쳐가 있다.

내가 겪은 몇사람과 전설처럼 들리는 이들까지 합쳐.

내가 플래쳐같은 팀장을 목격했을때,

다행히 나는 그의 말에 영혼이 휘둘리는 연차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광적인 하나의 방식을 고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절대 (아직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한 인간을 '찰리 파커'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나는 자주, 그들이 쏟아낸 독설의 양만큼 영혼이 빠져나가  

회의실 안에서, 파티션 아래에서 소리없이 무너져가는 팀원들을 보았다.

그들이 그때 잘못한 것은, 단지 그의 "my fucking tempo"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키가 크고 건장한 어떤 아이는, 플래쳐와의 회의시간 전마다 손을 떨었다.

전설처럼 들리는 어떤 플래쳐는,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시간 도중에 팀원을 집으로 귀가시켰고 (그의 아이디어가 짜치다는 이유로), 또 어떤 플래쳐의 사원은 "앞으로는 너의 아이디어를 종이로 출력하지 말고, 말로 설명해라. 종이가 아깝다"는 말을, 실제로 실천해야 했다.

나는 '그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만큼 연차가 쌓였다'는 사실에 좀 많이, 안도했다.



한때, 플래쳐같은 이들을 동경하기도 했었다.

한때는 앤드류같은 사람이 되려고도 했었다.

한계를 넘는 위플래시(채찍질).

그것 자체를 위대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세계의 수많은 플래쳐들을 목격하고,

나는 분명한 입장을 갖게 되었다.

위플래시(채찍질)란, 반드시, 타인이 아닌, 자발적 동기로부터만 나와야 한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 영화는 내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게 한, 

한 선생과 제자의 아름다운 성장기가 아니었다.


다만, 메시지에 몰입시키는 감독의 시각과 연출과 편집에 대해

영화를 보는내내 감탄했다.


[Whiplash] - Damien Chazelle

채찍질은 동기도, 실천도 셀프로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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