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가 500일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남자 친구 C의 집은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다. 집에서 받는 용돈은 늘 빠듯했다. 아르바이트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출근 날을 받은 직후 코로나가 터져서 하지 못하게 되었다.
돈 없는 남자 친구와의 데이트는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우리 카페에 와서도 H만 음료를 주문하고, C는 H가 주문한 음료를 한 모금 얻어 마실 뿐, 주문하지 않는 날도 많았다.
C와 사귀기 전, H는 학교에서 받은 장학금과 그간 용돈을 아껴 쓴 덕에 통장에 잔고가 백만 원 넘게 있었단다. 돈 없는 남자 친구와의 데이트로 자신의 통장 잔고가 바닥났다고 했다.
둘은 합의로 데이트 통장을 만들었다.
자취하는 C에게 코로나 재난지원금이 40만 원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그간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마음껏 먹었다. 그 돈을 다 쓰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각자 부모님께 받은 용돈에, 보너스처럼 들어온 재난 지원금까지 다 쓰고 바닥난 잔고를 보고 C가 울었단다. 마음이 불편한 H는 엄마께 사정해 용돈을 가불 받았다.
그즈음 H는 복학한 과 선배를 만났다. 선배가 밥을 샀고, H가 커피를 샀단다.
잠시 카페에 들른 H가 말했다.
“돈 걱정 없이 밥 먹고, 차 마신 게 오랜만이더라고요. 제가 원했던 데이트는 대단한 게 아니었는데, ‘왜 이런 걸 남자 친구가 아닌 이 선배랑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돌아가며 결심이 선 모양이다. 헤.어.지.자!
다음 날 저녁, 어두운 낯빛으로 C가 나를 찾아왔다. 예상하지 못한 방문이었다. 그런데 오죽 답답했으면 여기까지 왔을지 안쓰러웠다.
“사장님이 지난번에 저한테 옆 꽃 가게에서 H에게 꽃 한 송이 사주라고 하셨잖아요. 얼마 안 한다고. 제가 그거 안 했거든요. 후회되는 게 너무 많아요. 지금이라도 꽃을 선물할까요?”
나는 H가 그날 만난 선배와 사귀게 되리라 짐작했다. 그래서 C에게 섣부른 말을 할 수 없었다.
“헤집어진 직후에는 물의 바닥이 보이지 않아. 흙과 모래가 가라앉을 시간을 좀 가져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다만 한 달이라도. 그리고 감정이 좀 맑아지면 그때 다시 들여다보면 어떨까?”
C는 그러겠다 대답하고 돌아갔지만, 가슴이 뜨거운 20대의 남자는 조급했다. 그날 저녁 술기운을 빌려 H를 찾아갔단다. C의 방문은 H에게 더는 설렘이 아니었다. 돌아가라 설득해도 버티는 C에게 공포를 느낀 H는 선배에게 전화했다. 예상하지 못한 과 선배의 등장에 C는 적잖게 당황했던 모양이다. 이내 정신이 들었을 때는 배신감이 밀려오지 않았을까? C의 관점으로 H는 바람을 피웠거나 환승 이별을 한 것이니 말이다.
(아! ‘환승 이별’이라는 용어가 생소하신 분들을 위해 짧게 설명하자면, 교통수단을 갈아타는 것처럼, 만날 다음 연인이 준비된 상태로 하는 이별이라고 할 수 있다.)
H는 원래 바로 선배를 사귈 생각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다만, 그날 C의 방문이 도화선이 되어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그건 뭐 그렇다 치고!
가불 받은 용돈을 C 명의의 데이트 통장에 넣은 H는 돈이 없었다.
H는 C에게 문자를 보냈다.
- 데이트 통장에 돈은, 우리가 같이 쓰기로 한 돈이잖아. 40만 원 중에 12만 원을 쓰고 28만 원이 남아 있으니, 나에게 14만 원을 보내줬으면 좋겠어.
C에게서 쌍욕이 가득한 답문이 받았단다.
H도 그에 상응하는 답문을 보냈다고 했다.
C가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딸을 키우는 엄마의 입장으로 나는 정말 걱정이 됐다.
“그러지 마. 괜히 C가 나쁜 마음먹으면 어쩌려고 그래?”
“저는 그럼 뭐 가만있어요?”
“당장 돈이 없어서 그러면, 내가 빌려줄게.”
“제가 받아야 하는 돈 맞잖아요.”
나는 정말 H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음 날, H가 가게 문을 열자마자 들어섰다.
“사장님, C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왜? 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데이트 비용에 보태라면서, 18원을 보냈어요.”
할 말이 없었다.
우리 카페에 자주 오던 그 커플은 18원을 끝으로 완벽한 이별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시절 내 이별도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나 역시 헤어진 연인을 미워하고 욕하는 것으로 치유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지금은 그 돈이 커 보여도, 나중에 생각하면 14만 원은 별것 아니야.’하고 치부하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H에게 그게 큰돈이라는 것도, 싸워서 받아내야 하는 것도 인정해 주어야 했다.
혹시 세월이 지나, 내 나이가 된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리고 이들이 자기 행동을 후회한다면, 혹시 그렇다면, 해주고 싶은 말을 미리 남기고 싶다.
“그때는 그게 옳았어. 40대의 생각으로 20대 때 너의 행동을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들을 보며 철없어도 됐던, 좀 지질해도 됐던 나의 시간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때의 나에게도 말한다.
“그때는 그게 옳았어.” (*)
지난 사랑에 대한 저의 생각이 궁금하다면, 봄날은 간다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