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서 나쁜 점이 하나 있다. (하긴, 뭐 하나만 있을까?)
귀밑머리에 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화장품 가게에서 새치 마스카라를 하나 사다가, 아침에 화장할 때마다 몇 가닥 난 흰 머리카락을 살살 칠해 덮었다.
새치는 시나브로 영역을 넓혀갔다. 들추면, 언제부터 자랐는지 모르는 녀석들이 군데군데 한 가닥씩 포진해 있다. 게다가 까마귀 속 백로인 양 자태를 뽐내며 반짝이기까지 한다. 급기야 염색약의 힘을 빌려서 감추기 시작했다.
하나둘 잔주름이 늘어나는가 싶더니, 내 얼굴을 보며, ‘피부가 처진다’는 말의 실질적 의미를 확인하고 있다. 그렇게 노화는 진행 중이다.
그런데 외모의 노화는 그다지 슬프지 않다. 물론 좋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젊고 풋풋함은 사라졌지만, 나이가 가져다주는 다른 매력이 분명 다시 채워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때와 다르지만, 나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자뻑?)
그리고 누구에게 묻거나 검증하지 않은 채 혼자 믿어버린다. 나는 또래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고.
나이는 발목을 감아 묶는 실타래 같다.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한 타래씩 늘어나, 나가는 보폭을 줄여놓는가 싶더니, 이내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렇다고 주저앉기엔 너무 애달파서 한숨만 난다. 이런 것을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알았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니 자꾸 나보다 젊은 사람을 보면, ‘지금은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라고,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뭐라도 시도하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K 선생님께서 용건이 있어 전화를 주셨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선생님은 나에게 ‘요즘은 다 인터넷 커머셜로 돈 많이 번다는데, 니는 그런 거 안 하나? 니도 그런 것 좀 해 봐라.’하신다. 당신 주변에 누구는 뭘 해서 돈을 번다는 얘기를 전하시면서, 왜 그러고 사냐고 물으셨다.
“선생님, 선생님 보시기에 제가 그렇게 한심해요?”
사실은, 그때의 내가 나도 한심했다. 그런데 누군가의 공격이 들어오면 방어할 만큼은 아직 내가 나를 사랑했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멈칫했다. 당황한 숨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아니, 내 보니까, 니가 재주가 많은데, 그 재주를 제대로 쓰질 못하니 내 안타까워 그라지. 나는 지금 니 나이만 돼도, 해 보고 싶은 게 많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이가 드니까 이제 뭘 하기도 좀 늦은 것 같고…….”
60대 중반의 K 선생님의 애정이 어린 걱정이 과히 달갑지 않았다. 그러면서 문득 나도 해왔던,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라는 말이 그들에게도 그리 들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돌아보면, 나는 내가 바라보는 그들의 나이에도 하지 못한 일이 많았다. 심지어 그 이유가 ‘나이 때문’인 적도 있었다.
K 선생님이 내 나이 때 이루지 못한 일은, 어쩌면 내가 지금 이루지 못함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 당연함을 깨고 오르는 것을 보여준 누군가가 있음은 그가 대단하기 때문이지, 내가 부족해서는 아니다.
2002년, 배우 장서희가 연기대상을 거머쥐며 말한 수상소감을 여전히 나는 기억한다.
10년의 무명 생활은 끝이 안 보이는 터널 같았다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처럼 오랜 조연 생활을 하고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며 기회를 기다리는 많은 연기자분께 제가 희망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오늘이 내 인생에 가장 젊은 날’이라고, 하루라도 어린 오늘이 뭐든 시작하기 좋은 날이라고 말한다. 간혹 그런 말이 짐이 될 수도 있고, 성급한 시작으로 실패의 확률을 높일 수도 있다.
오늘은 내가 경험한 가장 나이 든 날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어제도 못 한 일을 오늘 시작하려니 주춤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어차피 늦은 거, 신중을 기하자. 나이는 분명 기회의 선택지를 줄인다. 그리고 나아가는 보폭을 줄인다. 실패하면 회복 또한 쉽지 않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든 뭐든 할 수 있는 나이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떤 것을 할 수 없음이 나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오늘 제대로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이다.
언젠가 나는, 내 나이 47살에 시작했노라고, ‘나이 때문에 시작을 주저하는 많은 분께 제가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하게 될 날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