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겁에 질린 병사들이 갑옷과 투구를 벗어던지고 도망갔다.
한 병사는 백 보를 도망가 멈추어 섰고, 다른 병사는 오십 보를 도망가 멈추어 섰다.
오십 보에서 멈춘 병사가 백 보를 달아난 병사를 가리키며 비웃었다.
“이런 비겁한 겁쟁이!”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오십 보나 백 보나 도망친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누군가는 그래도 오십 보에서 멈춘 병사는 망설였다 두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목숨 걸고 싸우는 병사의 눈에 보이는 그들이 차이는 그저 속도뿐은 아니었을까?
윗집 사는 친구가 유럽의 어느 집 정원에 피었음 직한 꽃들이 그려진 찻잔 세트를 새로 장만했다. 예쁜 찻잔에 커피를 담고, 꽃으로 둘러진 접시에 과일을 담아내어 주었다.
커피 한잔을 핑계 삼아 수다를 마시는 별일 없는 그날,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것보다 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티타임의 파장을 알리는 신호는 항상 비슷하다.
“그만 가서 저녁 준비해야겠다 오늘은 또 뭐 해 먹나….”
우리 주방에 그릇들이 더 초라해 보인다.
‘예쁜 그릇에 담으면, 음식이 더 맛있어 보일 텐데….’
결혼할 때, 엄마가 마련해 주신 그릇들은 혹여 깨질까 조심스러워 제대로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그릇에 그려진 장미꽃도 생화처럼 시들었다. 초라하다.
비싼 건 아니더라도 예쁜 것으로 그릇을 장만하자 결심했다.
인터넷을 폭풍 검색하여 마음에 드는 그릇을 골랐다. 제품의 구성도 좋고, 가격이 저렴한 제품을 선택하여 확인하고도 몇 번을 망설임 끝에, 지금 금요일 아침, 드디어 A 쇼핑몰을 통해 그릇을 한 세트를 주문했다.
‘내일 그릇이 도착하겠지?’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A쇼핑몰에 접속해 ‘배송 조회’를 확인했다. 요즘 인터넷 쇼핑몰은 대부분 제품이 당일 배송이어서, 그쯤 확인하면, ‘배송 출발’이 되어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아직 ‘상품 준비 중’이란다. 어쩐지 섭섭했다.
뜻밖에도 그 섭섭함은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천만다행’ 한 일이 되어주었다. 발송 여부를 확인하는 그사이에, 같은 제품의 광고가 모니터 하단에 보였다.
세상에! 같은 제품을 B 쇼핑몰에서 더 싼 값에 판매하고 있었다. 게다가 구성도 더 다양했다. 나는 얼른 A 쇼핑몰을 접속해서 제품 구매를 취소했다. 잠시 후, 구매가 취소되었다는 확인 문자를 받고, B 쇼핑몰에 들어가 다시 제품을 구매했다.
이 제품은 아무리 늦어도 다음 화요일쯤에는 받을 것이다. 뿌듯했다.
토요일 오후였다. 뜬금없이 택배로 물건이 한 박스 왔다. A 쇼핑몰에서 보낸 그릇 세트가 도착했다. 전산오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그들은 나에게 이 제품이 발송되었는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B 쇼핑몰에 주문한 물건도 왔다.
‘A 쇼핑몰에 전화해서 얘기할까? 아니면 모른 척 그냥 가지고 있을까?’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이 황당하지만, 횡재가 될지도 모를 사건을 친구들에게 얘기했다. 대부분은 일단 가지고 있어 보라고 말했다. 그중 한 명이 제법 괜찮은 제안을 했다.
“일주일쯤 그냥 가지고 있다가 A 쇼핑몰에서 제품 반품해 달라는 연락이 없으면, B 쇼핑몰 제품을 반품해. 그러면 그릇 세트가 공짜로 생기는 거잖아?”
아하!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나는 며칠만 잘 버티면, 10여만 원짜리 그릇 세트가 공짜로 생길지도 모른다.
살짝 안달이 나기도 했다. 내가 갖고 싶었던 그릇이 집에 두 박스나 있는데, 너무너무 꺼내 보고 싶은데, 그 포장조차 뜯어볼 수 없다니.
그날 저녁도 우리 식구는 쓰던 그릇에 음식을 담아 식사를 했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어쩌다 보니 당장은 ‘그림의 떡’이 되어 버린 그릇이 두 박스가 우리 집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식사를 마치곤 남편과 텔레비전 뉴스를 보았다. 연일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보도되고 있었다.
나라 살림을 저리 말아먹고도 잠이 올까? 참 간도 크다. 나는 십여만 원짜리 그릇 한 세트를 가지고도 이리저리 궁리하는데.
뉴스가 끝나고, 나는 조용히 일어나 B 쇼핑몰에서 구매한 그릇의 포장을 풀었다. 색이 선명한 예쁜 그릇을 하나하나 꺼내며 나는 웃었다.
며칠 기다리는 것이 어려워한 결정은 아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의 물건이 아닌 것을 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뉴스에 보도되는 비리들과 비교해 내 잘못의 크기가 보잘것없다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며칠 기다린다더니 왜요?” 남편이 물었다.
“그냥 쓰려고요. 우리 가족 식사 담을 그릇인데, 장물에 담을 수는 없잖아요?”
남편은 조용히 웃으며 함께 그릇 정리를 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