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임을 함께하는 H의 새 직장이 우리 집 근처라, 점심시간에 라면 먹으러 와, 하고 군소리하던 끝에 약속을 잡았다. 내친김에 간단한 식사와 차나 한잔하자고, 그 자리에 있던 L과 J도 함께 시간을 조율했다. 그러다 보니, 그날 모임에 오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 좀 신경 쓰였다.
두 명은 직장을 다니는 터라 초대해도 못 올 테니, E에게만 따로 물어보자 생각했다.
E는 그날, 모 중학교에 수업 지원을 나간다면서 수업이 끝나는 대로 바로 우리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약속 전날, 혹시 잊지나 않았을까, 다른 사정이 생기지나 않았을까 싶어, 사람들에게 따로 내일 보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L은 사정이 생겨서 못 갈 것 같다고 미안하다 답신을 보내왔다. H와 J에게는 내일 보자는 답신이 왔다. E에게서는 답신이 없었다.
E가 이런저런 봉사활동을 많이 한다는 것은, E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답문 메시지 한 글자 보내오지 않는 것은 기분 좋지 않았다.
(나는 바쁘다는 말은, 마음 쓸 여력이 없다는 완곡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날 나는 쫄면과 몇 가지 튀김 요리를 준비했다.
H는 식사를 끝내고, 1시까지는 사무실로 돌아가야 했다. 당초 12시 반에 수업이 끝난다고 했던 E를 기다릴 수 없는 터라, E가 오면 만들어 줄 식재료를 한쪽에 남겨두고, 음식을 만들어 먼저 식사했다.
12시 반이 지나도 E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내 기분은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H가 “E언니 왜 안 오죠? 전화해 볼까요?”한다. 나는 쓰게 웃었다. 내가 보낸 메시지에 답신이 없을 때부터 나는 어쩐지 E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전화 안 받네요. 아직 수업이 안 끝났나? 언니 얼굴 보고 가려했더니, 안 되겠네요.”하며 H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조금 지나, H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E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렸다.
“전화했었네.”
“아, 저 하리 언니 집에 있는데, 언니 언제 오나 해서요.”
“아, 내가 수업이 늦게 끝났는데, 나오는데 교장 선생님이 같이 점심 먹자 하신다. 아무래도 나는 못 갈 것 같아.”
“아네, 다음에 봬요.”
H는 전화를 끊으며, 나에게, 들으셨죠? 하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차 한 잔을 천천히 마시고 J도 돌아갔다. 그런데, 불쾌한 기분은 여전히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었다.
대단치도 않은 점심 식사, 별로 중요한 만남도 아니었다. 나는 애초에 E를 초대하지 않았어도 됐다. 일정이 있다면, E는 응하지 않아도 되는 약속이었다. 물론 그때는 올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막상 당일에 약속을 못 지킬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그렇지만 나에게 사과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오후 5시쯤, 나는 E에게 전화했다. 받지 않았다. 부재중 전화가 떠 있을 테니 전화를 걸어올 거로 생각했지만,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 감정은 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저녁 8시쯤, 다시 E에게 전화했다. 자다 깬 목소리다. 늘어지게 하품하는 소리에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뜨고, 숨을 한번 가다듬고 물었다.
“너, 나한테 뭐 화난 거 있니?”
“아니. 왜?”
E는 태연했다.
나는 그저께 답을 받지 못한 메시지부터, 못 온다고 연락하지 않은 것, 차후에라도 미안하다 연락하지 않은 것, 내가 기분이 너무 상해서 전화했는데, 그때 못 받았어도, 부재중 전화가 와 있으면 당연히 해 줘야 할 연락도 하지 않은 것을 따져 물었다.
“굳이 말하자면, 애초 어제 점심에 너를 초대할 이유는 없었어. 그런데도 내 딴에는, 심지어 네가 늦게 오면 식사를 두 번 차려야 할 걸 알면서도 일부러 불렀어. 그런데 이러는 건 정말 예의가 없는 거야.”
“하리야, 미안해. 근데 내가 진짜 너무 바빠. 요즘 진짜 내가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그제도 봉사 활동 자료 때문에 이틀을 밤을 새웠어. 지금도 애 학원 끝날 시간 맞춰 나가기 전에 잠깐 잔 거야”
“그럼 애초에 못 온다고 거절했어야지!”
“가려고 했어. 요즘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 가서 오랜만에 사람들 만나서 수다도 떨고 놀라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이 식사같이 하자고 하시는데 어떡해?”
“그래. 좋아. 그렇다 치자. 약속이라는 건 지켜야 하는 거지만, 못 지킬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이만저만해서 약속을 못 지키게 됐다고 연락은 해야지.”
“H가 말 안 해? 나는 H랑 통화했으니까. 전해줄지 알았지.”
“H가 전했어도, 초대한 사람은 난데, 당연히 나한테 사과 전화는 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기분이 나빠서 전화했는데, 전화를 못 받아도, 부재중 전화가 와있으면 콜백은 해야지.”
“하리야, 내가 요즘, 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 연락 와도 다 답신을 못 해줘.”
“뭐라고?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안부 전화를 걸었던 게 아니잖아. 약속을 못 지킨 해명 정도는 해야 하는 거잖아. 내가 너한테 그 정도 가치도 없어?”
내 언성은 높아졌다.
“하리야, 네 말 듣고 보니까 내가 미안하다. 그런데, 친구니까 그냥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나 봐.”
“이해는 구하는 거지, 강요하는 게 아니야. 적어도 이해를 얻기 위한 설명을 해야지.”
E는 제 설움에 울기 시작했다. 요즘 일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았다며 개인 사정을 늘어놓고는, “내가 진짜 미안하다. 생각을 못 했다.”라고 말했다.
물론, 나도 안다. 이게 뭐 이렇게까지 따질 일인가?
이번이 약속을 처음 어긴 것도 아니었다. E와 나는 ‘약속’이라는 정의가 다른 사람인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나는 E를 참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이제부터는 약속은 꼭 지켜줬으면 했고, 못 지키게 되면 꼭 양해를 구하고, 사과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냐고 말해주고 싶었다.
괜스레 어설픈 사과 한마디 듣고, 울음만 달래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며칠 후, L을 만날 일이 있었다. 사실 나도 그날 일의 잔해들이 남아있는지라, E에게 전화해 화냈다고 넌지시 얘기를 꺼냈다. L이 멋쩍게 웃는다. 그 표정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어 하는 대답 같았다. ‘들으셨죠?’하고 물으니, L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E가 그러더라, 물론 자기가 잘못했는데, 무슨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하리 씨가 같은 얘기를 여러 번 반복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 그렇구나.
애당초 강요된 사과가 진심일 리 없었다.
그렇게 받은 사과의 맛이 너무 씁쓸했다.
L은 E가 분명 잘못했지만, 나의 말투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얘기했다.
누군가가 나를 가르치려는 투로 얘기를 하면, 미안한 마음에도 반발심이 생길 수도 있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돌아섰다.
하긴 나 까짓 게 뭐라고 누굴 가르치겠어?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시 한 편이나 여기에 남기련다.
사과
미안하다는 말 다음에 오는 말들은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그럴듯한 말이 대부분이다.
사과를 하려면 진심 어린 미안함과
그 미안함에 대한 앞으로의 다짐,
어떤 점이 미안한지에 대한 고백만 있으면 된다.
“미안해, 그런데… ”라는 말은 필요 없다.
- 김상현, ‘그러니 바람아 불기만 하지 말고 이루어져라’ (경향 BP, 2017) 中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