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에서 길을 헤매던 어린 왕자가 들어선 곳은 장미가 만발한 정원이었다.
어린 왕자는 그의 꽃과 쏙 빼닮은 것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누구니?” 깜짝 놀란 어린 왕자가 그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장미꽃이야.” 장미꽃들이 말했다.
“아, 그래?”
그러자 어린 왕자는 자신이 아주 불행하게 느껴졌다.
이 세상에 자기와 같은 꽃은 하나뿐이라고 그의 꽃은 그에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원 하나 가득히 똑같은 꽃들이 오천 송이는 되는 게 아닌가!
‘내 꽃이 이걸 보면 몹시 상심할 거야.’ 어린 왕자는 생각했다.
‘기침을 지독히 해대면서 창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죽는시늉을 할 거야. 그럼 난 간호해 주는 척하지 않을 수 없겠지. 그러지 않으면 내게 죄책감을 주려고 정말로 죽어 버릴지도 몰라…….’
그리고 그는 이렇게도 생각했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꽃을 가진 부자인 줄 알았는데 내가 가진 꽃은 그저 평범한 한 송이 꽃일 뿐이었어…….’
어린 왕자는 풀숲에 엎드려 울었다.
여우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함께 놀자 하자 여우는 자신은 길들여지지 않아서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길들인다’는 게 무엇인지 물어본다.
여우는 그건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관계를 만든다고?”
“그래.” 여우가 말했다. “… 난 너에겐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난 너에게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 너는 금빛 머리칼을 가졌어.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근사할 거야! 밀은 금빛이니까 나에게 너를 생각나게 할 거거든. 그럼 난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야. 부탁이야. 나를 길들여 줘.”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어린 왕자가 물었다.
“참을성이 있어야 해. 우선 내게서 좀 떨어져서 이렇게 풀숲에 앉아 있어. 난 너를 곁눈질해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말은 오해의 근원이지. 날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였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여우는 말했다.
“아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왜 길들여 달라고 해서 얻은 것 없이 슬퍼하냐 물었다.
“얻은 게 있지. 밀밭의 색깔 때문에 말이야.” 여우가 말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장미꽃들을 다시 가서 봐. 너는 너의 장미꽃이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라는 걸 깨닫게 될 어야. 그리고 내게 돌아와서 작별 인사를 해줘. 그러면 내가 네게 한 가지 비밀을 선물할게”
어린 왕자는 장미꽃들을 보러 갔다.
다시 본 장미꽃은 어린 왕자의 장미와 전혀 닮지 않았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들에게 말했다.
“나의 꽃은 지나가는 행인에겐 너희들과 똑같이 생긴 것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그 꽃 한 송이가 내게는 너희들 모두보다도 더 소중해. 내가 그에게 물을 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바람막이로 보호해 준 것은 그 꽃이기 때문이지. 내가 벌레를 잡아 준 것도 그 꽃이기 때문이지. 불평을 하거나 자랑을 늘어놓거나, 때로는 말없이 침묵을 지키는 것까지 들어주었으니까. 결국, 내 꽃이니까 말이야.”
우리 딸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비슷한 또래의 아이로 보이겠지만,
그 아이는 내게 세상 누구보다 특별하다.
우리 아이니까.
나는 이 아이에게 책임이 있으니까.
올해 우리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4월 초,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꽃씨 심기’를 과제로 내주었다. 듣던 대로 아이의 과제는 엄마 몫이다. 우리 가족은 동네 꽃 가게에 가서 흙과 화분, 코스모스를 비롯해 몇 가지 꽃씨를 샀다. 아이뿐만 아니라 남편과 나도 씨앗을 뿌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닷새 정도 지나 씨앗은 하나둘씩 발아했다. 그걸 지켜보는 건, 기대치 않은 즐거움을 주었다. 그렇게 한 달 보름쯤 지난 며칠 전, 때 이른 코스모스 꽃이 피었다. 가을이면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는 이 흔한 꽃이 이리 예쁜 줄 예전에 미처 몰랐다.
그즈음 딸아이는 피아노 대회에 나갔다. 보통 2학년 때부터 대회를 내보내는 모양이다. 5월에 있었던 피아노 대회의 1학년 참가자는 모두 네 명. 아이는 공동 3위를 했다. 누구 한 명만 상을 주지 않기 뭐 했던 주최 측의 배려인 것 같았다. 그날은 웃었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 또 다른 피아노 대회가 있었고, 이번에도 다른 학년과 달리 1학년 참가자는 다섯 명에 불과했다. 지난번 대회 때보다 다른 아이들의 실력이 더 월등하게 느껴졌다. 물론 지난번보다 우리 아이도 실수 없이 잘 쳤지만.
그날 오후, 학원 선생님의 문자를 받고 아이의 성적을 알게 되었다. 참가자가 적었던 탓에 상은 하나 받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저녁 식사 시간에 아이가 물었다.
“엄마, 나 몇 등 했을까?”
나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동 4위였다. 그런데 아이에 대한 실망에 내 심사가 꼬였던 모양이다.
아이 얼굴에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놀란 표정이 드리웠다. 그러고는 이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받아쓰기 60점을 맞아도 ‘틀린 것보다 맞은 게 더 많잖아?’ 하며 웃는, 너무 욕심이 없는 것 같아 엄마를 걱정시켰던 이 아이에게도 자기가 꼴찌라는 사실은 못내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아니야. 우리 딸이 못한 게 아니라 친구들이 좀 더 잘한 거야.”
이런 말이 위로될 리 없었다.
“영이, 피아노 학원에 1학년 친구가 몇 명이야?”
“스무 명 정도.”
“그런데 이번에 대회 나간 친구는 몇 명이야?”
“두 명.”
“거봐. 학원에서 제일 잘하니까 대회에 나간 거 맞지? 다음엔 더 많이 연습해서 더 잘하면 되는 거야. 그치?”
나는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우리 집 베란다에 핀 코스모스는 작고 예뻤다. 우리 집에서 핀 꽃이라 더 예뻤다. 좋은 흙을 사서, 화초용 영양제를 꽂아주고, 날마다 살피고, 마르지 않게 물을 주며 가꾸어 핀 꽃이라 크기 따위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보니, 이 꽃은 거리에 피는 코스모스 크기의 반에도 미치지 않는 작은 것이었다. 이 정도 조건을 만들어주고, 이 정도 정성을 들였으니 해바라기만 한 꽃을 피워도 모자랄 판에, 꽃대도 불과 20cm나 될까? 지금 보니 그랬다.
‘내가 너한테 해바라기만 한 꽃을 피우랬어? 적어도 제대로 된 꽃은 피워야지!’
나는 정당한 듯 작은 코스모스를 다그치고 있었나 보다.
작은 화분에 갇힌 꽃이 얼마나 클 수 있었을까. 이건 코스모스의 문제가 아니다. 이 꽃씨도 바람 타도 날아가 기름진 어느 땅에 떨어졌으면, 튼튼한 꽃대에 크고 예쁜 꽃을 피웠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 아이는 한해살이 꽃도 아닌데,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내년 봄에는 작은 나무 모종을 심어봐야겠다. 한해 한해 줄기가 굵어지고 마디마디 가지가 올라가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혹여 기대하지 않은 어느 날, 이 나무에 꽃이 피게 되면, 비록 그 꽃이 오늘보다 더 작더라도, ‘어찌 폈을지도 모를 해바라기만 한 코스모스에 비할 수 있을까?’하며 오늘을 웃어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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