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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Mar 09. 2021

아들의 장례를 치르다

619-13번지 5화. 청상과부 두 사람.

@류병석 지음 


52년 생, 현 70세.

어느날 갑자기 자서전이 쓰고 싶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나열하는 게 왠지 부끄러우셨던 것 같다.

아버지의 자서전은 자전적 소설로 바뀌었다. 

아버지는 과연 이 이야기를 끝까지 완성할 수 있을까.

이것은 아직, 내가 태어나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 나의 증조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장골 아주머니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남의 나라에 빼앗긴 땅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양반이 남아 있고 체통을 고수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극도로 혼란한 전쟁 속에서는 살아남는 것만이 최고의 목표였다. 장골 아주머니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밤을 낮 삼아서 베를 짜서 장에 내다 팔고, 밭을 빌려서 뽕나무를 키워서 누에도 기르며 아등바등 살아갔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삶은 그다지 나아질 줄을 몰랐다.      


그 와중에 병약한 남편은 40도 못 넘기고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운명이 제천인데 어찌하랴. 대성통곡을 해본들 무엇하랴. 팔자려니 생각하고 몸을 추슬러 장례를 치렀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병약해도 아들이 있지 않은가. 장골 아주머니는 매일같이 신세 한탄을 하면서도 꿋꿋이 살아갔다. 손이 귀한 집이라 장골 아주머니는 빨리 아들을 장가보내고 싶었다. 아들이 아직 어린 나이었지만 하루라도 서둘러 손자를 봐 대를 이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리저리 매파를 놓아서 며느릿감을 찾았다. 병약한 아들이지만 그래도 손자는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며느릿감은 생각보다 쉽게 구해졌다. 그때만 해도 모두가 먹고사는 자체가 힘들어 입 하나 던다고 하면 이것저것 재보지도 않고 딸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 문제는 장골 아주머니가 본 며느리도 몸이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병주가리도 이런 병주가리가 없다. 팔자가 몸이 약한 사람들하고만 살라는 건가.      




장골 아주머니 빼고는 식구가 되는 사람마다 병약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도 어찌하랴. 장골 아주머니는 열심히 베 짜고 누에 키우고 닥치는 대로 일하며 며느리까지도 먹여 살렸다. 장골 아주머니는 천지신명에게 빌었다. 성주신에게도 빌었다. 장광 신에게도, 굴뚝 신에게도 그저 비나이다 비나이다 대를 잇게 손주 하나 점지해달라고 매일같이 빌었다. 장광에 정화수 한 그릇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정성이 부족해서인지 애는 생기지 않고 아들은 점점 더 쇠약해져 갔다.     


(나 : '병주가리'와 '장광 신'이라는 단어가 어색해서 사전에서 검색해보았다. '병주가리'는 충청도 방언으로 '병주거리'라고도 한다고 한다. '장광 신'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장광'이 '장독대'의 방언이자 집뒤안 또는 집옆에 장항아리과 된장항아리 등을 보관하는 곳으로 넓다란 돌로 평평한 단을 쌓아둔 곳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또 이렇게 하나 배웠다.

특별한 종교가 없고, 무위자연이나 조상신을 섬기는 우리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새벽에 일어나 '정화수'을 떠 놓고 자식들의 안녕을 비신단다. 그 이야기를 처음 엄마에게 전해 들었을 때, 조금은 가슴이 아팠다. 자식들에게 내색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얼마나 자식들의 행복을 바라고 있는지 느껴져서. 그런 아버지의 바람에 내가 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서글퍼졌다.) 

 

장골 아주머니는 모든 정성을 쏟아부어 아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없는 살림에 몸에 좋다는 것은 다 해 먹였다. 하지만 아들은 좀처럼 좋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고, 점점 더 야위어만 갔다. 점도 쳐보고 굿을 해봐도 무용지물이었다. 무엇을 해도 백약이 무효고 아들은 점점 더 시들어가 빛을 잃으니 끝내 깨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장골 아주머니의 팔자는 왜 이리 사나운가. 시숙 죽어, 남편 죽어, 아들까지 죽었으니 무슨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어찌하랴. 산 사람은 살아야지.   

   

며느리와 함께 아들 장례를 치르는 어미의 심정을 생각해보았는가. 억장이 무너지고 말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슬픔이다. 이보다 더한 슬픔이 어디 있겠는가. 장례를 치르고 병약한 며느리와 둘이서 살아가는 수밖에. 남은 이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둘 다 청상과부가 되었다. 장골 아주머니는 그렇게 빌고 고대하던 대를 이을 손자를 얻지 못했다. 장골 아주머니의 소원은 끝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장골 아주머니는 조상을 생각했다. 대가 끊겼으니 죽어서 어떻게 조상 곁으로 갈 수 있을까. 그 시대를 '여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간 이들의 숙명이었다. 장골 아주머니는 매일매일을 근심과 걱정으로 보냈다. 이놈의 기구한 팔자. 아무리 산 사람은 살자 다짐을 해봐도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어도 배가 고픈 줄을 몰랐다.   


(나 : 이 부분은 내가 약간 수정을 했다. 지금을 사는 여성이라면 '대를 잇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가 끊겼다'며 자신을 자책하는 장골댁, 나의 고조 할머니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삶을 꾸려나간 장골 댁이라면 그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를... 현대를 사는  자손은 바라고 또 바랐다. )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니 남은 것은 홀로 남은 며느리였다. 서로 얼굴만 바라본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장골 아주머니는 다시 기운을 차리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산목숨이니까. 며느리를 보고 있노라니 더욱 더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어디 한번 사는 데까지 살아보자꾸나. 장골 아주머니는 며느리를 토닥이면서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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