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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Mar 12. 2021

장골댁의 양자 들이기 대작전

619-13번지 6화. 어린 손자, 태

@류병석 지음 


52년 생, 현 70세.

자식은 아버지를 고지식한 독불장군으로 기억한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냈는지는 알지 못한다.

자식이란 존재가 그러하다.

나의 부모가 어떤 삶과 시간을 견디어 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자식은 때때로 부모의 가슴에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낸다.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고 병약한 며느리와 둘만 남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산 사람은 살아야지. 장골댁은 며느리와 둘이서 다시 베도 짜고 누에도 기르며 평상을 되찾아갔다. 동네에 마실도 다니며 당차게 살기로 했다. 다시 여장부가 되었다. 많이 움직이고 많이 활동하는 것이 아픔을 잊는 또 하나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골 아주머니는 무슨 일이든지 몸 사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다.      


그때 즈음 그 지역 여맹위원장도 됐다. 바깥 활동을 많이 하고 집안 살림도 깔끔하니 주변에서 과부 둘이 산다고 깔보는 일이 없었다. 풍상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장골 아주머니에 대한 주변 칭송이 자자했다. 당당하게 살아가는 장골 아주머니, 장하다 장해.     




산 하나를 넘어 장골에서 죽골로 시집온 장골 아주머니.

 

옛날에는 여자가 한번 시집가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했기에 친정집에 가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저 산 하나 넘으면 갈 수 있는 친정이지만, 그렇게 알고 배워왔기에 친정에 갈 생각은 아예 못 하고 살았다. 며느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 시대에 법도요, 삶의 방식이었다.      


누가 누굴 가르치고 가르침 받고, 도움 주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나물죽에 한 끼 때우고 물로 배 채우고 죽도록 일을 해도 먹고사는 형편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일본 놈들은 수탈해가고, 3년이나 가뭄과 홍수로 농사가 흉년이 들었으니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 시절은 관리들과 양반네들 일부 빼고는 국민 전체가 농민이었다. 무엇인가는 심어 수확해 일본 놈들의 배를 채워주고 양반네들에게 소작료를 주고 나머지로 먹고살아야 하는 고단한 삶이었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절. 그런 세월이 36년간이나 지속되었으니 나라 잃은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으리. 남편도 자식도 없는 장골 아주머니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어려웠겠는가.     


그러나 장골 아주머니는 모진 세월을 탓하지 않고 꿋꿋하게 잘 버티며 살아갔다. 밤낮으로 일해 한푼 두푼 모아서 요골에 밭 500평을 샀다. 대단하다. 자랑스럽다. 내로라하는 남자들도 하기 힘든 일을 여자의 몸으로,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해낸 것이다. 대단한 여인임에 틀림이 없었다.      




며느리는 집안 살림을 하고 시어머니는 사내들도 하기 어려운 들일 산일을 닥치는 대로 가리지 않고 했다. 그렇게 몇 년을 모아 문전옥답은 아니지만, 또다시 동리에서 꽤 떨어진 외진 사바리골에 논 서마지기를 샀다. 여자의 힘으로 쉽게 하지 못 할 일이었다. 여장부나 되었으니까 그렇게 살았지.      


나름 안정된 삶을 살았지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남의 집에 시집을 왔으면 대를 이어 조상님들한테 살면서 할 도리는 다하고 왔노라 말해야 하는데, 아직 나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구나. 장골 아주머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를 잇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양자를 들이는 것이었다.      


땅도 조금은 샀겠다 장골 아주머니는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가차운 곳에서는 양자를 들일 데가 마땅히 없었다. 사촌도, 육촌도, 팔촌도 없었다. 먼 친척 중에 아들만 여럿 둔, 한 18촌 쯤 되는 조카를 꾀기 시작했다. 금술 좋은 조카는 딸은 없었고 아들만 여러 명 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집 역시 생활이 어려웠다. 조카뻘 되는 사람은 허허, 하하 술만 좋아하지 생활에 있어서는 무능력자였다.   

   



장골 댁은 계략을 세워 조카뻘 되는 사람으로부터 아들 한 명을 데려올 궁리를 시작했다. 40리나 되는 길을 걸어다니며, 조카를 구워삶았다. 조카뻘이라고는 하지만 나이는 장골댁과 크게 차이가 나질 않았다. 세대가 같기 때문인지 이야기는 거침이 없었고 죽이 잘 맞았다. 조카뻘이 술을 좋아한다고 앞 전에 이야길 했다. 장골 댁은 조카뻘에게 술을 사주며 꾀기 시작했다.      


“입 하나 더는 게 살기도 어려운 데 어디겠는가.”

“아들이 여럿이니 내가 데려가서 잘 먹이고 잘 입힐 테니 우리 집안에 보내주게.”

“땅도 있고, 먹고 살만은 하네.”      


몇 번의 만남과 술대접, 장골 댁의 꼬임에 조카뻘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장골 댁이 누구인가. 누구도 말리지 못할 여장부 중의 여장부 아니든가. 그렇게 조카뻘은 장골 댁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가게 된다. 그렇게 장골댁의 손자이자 며느리의 아들이 입양된다.


그 사람이 바로 나의 아버지, ‘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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