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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Aug 01. 2023

너무 간절해서 듣고 싶지 않은 이름

 ‘친구’라는 버튼


내겐 일종의 부정 버튼이 있다. 좋은 책을 읽다가도, 좋은 드라마를 보더라도 어떤 장면이 나오면 나는 곧바로 뾰족한 태세가 된다. 별 것 아니다. 오래된 친구들과 술 한잔 하며 사는 얘기나 푸념을 늘어놓는 장면. 혹은 ‘이런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친구들이었다’라는 뉘앙스의 이야기.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접하면 나의 감정은 질투와 슬픔과 저항감과 방어기제들로 울그락불그락 다채로워진다. 말하자면 나의 부정 버튼은 ‘친구’다.


나는 몇 년 전 친구를 잃었다. 멀어짐으로써 잃은 것인데 단순한 멀어짐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세계에서 나를 지우겠다고 선언했고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지워짐을 겪었다. 오래된 친구는 아니었지만 나이 먹어 진짜 친구를 만나기란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인지, 서른 넘어 사귄 그가 나는 너무 각별했다. 너무 각별해서 나는 너무 자주 선을 넘었고 그는 그걸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라고 추정한다.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달라지려고 노력했다.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매일 누워 울더라도 혼자 일어나려고 했다. (물론 남편과 언니, 가족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의존증에 가까울 정도로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나였는데. 여전히 운전도 할 줄 모르고 때때로 혼자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맛있는 것을 먹거나 좋은 경치를 보고 싶지만 그 마음은 구석에 밀어 넣고 나의 시간을 즐긴다. 뚜벅이 여행도 괜찮고 혼자 식당이나 영화관에도 잘 간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친구’는 나의 부정 버튼이다. 그 말은 나의 어딘가를 콕 찌른다. 내 몸에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구멍이 있는 것 같다. 콩쥐의 뚫린 장독을 막아주던 개구리는 나에게 없다. 물론 내 주변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 남을 돕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고운 이들이 꽤나 많다. 하지만 나는 다시 상처 주거나 상처받고 싶지 않다. 예전처럼 선을 넘어 다가가거나 내게 잘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기대하는 순간 나는 또 무너질 것이다.


지금 나의 친구는 글쓰기, 책, 그리고 약이다. 처음엔 낯설어 반항을 좀 하였지만 이제는 착실하게 약을 먹는다. 그리고 말이하고 싶을 땐 메모장을 열어 글을 쓴다.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지 않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책을 읽는다. 내 존재의 가치나 이유를 타인에게 증명받지 않으려고 하는 중이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애써서 그렇게 하려 한다.


그럼에도 나는 언제가 될지 모를 ‘언젠가’를 생각한다. 요즘처럼 더운 여름밤, 함께 미세한 바람을 느끼며 걸어줄 친구, 그러다 편의점 앞에서 맥주나 캔커피를 번갈아 사줄 수 있는 친구를 기다린다. 내 인생에서 그것이 필수라거나 성공의 증표는 아니지만. 작은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환풍 구멍처럼, 어딘가에 있어주면 좋겠다. 장독대를 막아주는 개구리만큼 희생적일 필요도 없다. 서로 잠깐씩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고, 잘 지내나 궁금해해 주면 그걸로 된다. 사실 나는 기다린다. 어쩌면 너무 간절해서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친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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