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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Aug 10. 2023

나를 위한 투샷, 내일이 없는 커피를 만들다


글도 적지 않고 책도 읽지 않는 요즘이다. 아이가 방학을 했고, 날이 너무 더웠고. 시골집이라 여름에도 비교적 시원했었는데 올 해에는 에어컨을 하루종일 틀고 있다. 심지어 밤에도 틀어놓고 거실에 이불을 깔고 잠을 잔다. 유난한 여름이다. 아마 매년 더해지겠지.


태풍이 온다고 하여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 있는 아침. 빗소리를 들으며 메모장을 열었다. 오늘은 뭐라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뭐에 대해 써볼까.


요즘은 ‘나를 위한 커피’를 만들어보고 있다. 매일 아침 커피머신으로 커피를 내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먹는데, 그동안 내가 먹는 커피는 ‘커피색이 나는 물’에 가까웠다. 약을 먹는 기간에는 카페인 섭취를 조심해야 하기도 하고, 수동으로 매일 얼음을 만들어두는 일에 품이 제법 들기 때문에. 귀한 얼음을 아주 조금만 넣고 샷(커피 원액)은 하나만 넣어 아.아를 만들다 보니 얼음은 금세 녹아버리고 미지근하고 밍밍한 커피가 되어버린다.


남편이 만든 아.아를 마셔보면 늘 초콜릿 향이 느껴지는 맛있는 커피였다. 처음엔 남이 만든 커피라 맛있게 느껴지는 거라 생각했는데 먹을수록 그런 심리적인 문제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같은 원두, 같은 기계를 쓰는데 왜 다를까 하고 지켜봤더니 남편은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투샷을 넣어 만드는 거였다. 평소 내일이 없는 스타일로 뭐든지 가득 넣어 요리를 하는 그답게 커피도 내일이 없는 커피였다. 내일이 없는 커피. 그게 비결이었어.


그 뒤로도 몇 번 더 맹숭맹숭한 커피를 만들어 먹다가, 이제 이런 건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잔도 내 마음대로 못 만든단 말인가. 그날부터 얼음 가득 잔에 채워 투샷을 넣은 커피를 만들어먹기 시작했다. 한 잔을 먹더라도 맛있게. 항상 작은 일에도 조심스럽던 나에게는 큰 결심이고 중요한 변화다.


비 오는 아침인 오늘도, 얼음을 가득 넣은 투샷 커피, 이름하여 ‘내일이 없는 커피’를 만들어 마시며 이 글을 쓴다. 초콜릿 맛과 향이 나는 좋은 커피 한 잔. 작은 일이지만 나를 조금 더 소중히 대하는 기분이다.

아이기 뉴스를 틀어놓고 자꾸 ‘엄마, 엄마’ 부른다. 어제부터 창문에 테이프를 붙이자고 난리였다. (그 정돈 아니라고 달래서 붙이진 않았다.) 남부지방은 벌써 태풍이 덮친 상태. 아무쪼록 누구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면 좋겠다. 아무 일도 없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무사한 하루를 기원한다.


얼음을 가득 채운, 내일이 없는 커피



태풍이 오기 전 어제의 하늘, 그리고 지붕 위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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