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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Aug 23. 2023

여행, 그리고 다시

여름독서피정을 다녀와서

어제는 점심도 거른 채 하루 종일 침대든 소파든 어디든 등을 대고 누워서 지냈다. 2박 3일간의 뜨거웠던 독서피정 여행을 다녀와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 여행 자체가 충전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행을 모르는 사람이다. 여행은 노동이다. 매우 적극적인 노동. 스스로 애써서 자발적으로 돈 들여 고행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런 여행을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신기하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눈 뜨면 지리산 둘레길이 펼쳐지는 생태탐방원에서 드립커피를 내려 베란다에 앉아있던 아침이 꿈인 것만 같다. 작렬하는 태양과 그림 같은 구름이 만들어내는 예술작품 같은 하늘 아래서 한 바가지씩 쏟던 땀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저마다 책 읽기에 집중하던 시간들은. 나는 다시 잠옷 바람이 되어, 설거지와 머리 감기를 귀찮아하며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뒹굴고 있다. 현재로 돌아왔다.


책을 몇 권 팔았고, 그만큼의 책을 사 왔고, 100페이지 정도 책을 읽었고* 15명 정도의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여행 이전과 달라진 점은 그 정도이다. 어쩌면 며칠 안에 흐릿해질 기억들.


그럼에도 여행은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다. 낯선 시공간에 온전히 나를 던져놓고 내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보는 시간. 다녀와서 달라진 게 하나도 없을 것 같겠지만 나의 세포는 분명히 기억한다. 내가 낯선 사건과 경험 속에서 몸으로 체험하고 체득하고 선택한 것들을. 그것들이 나의 유전자 지도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여행을 다녀와서도 자신의 현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 괴로워 여행을 가는 것이 두렵다는 말을 듣곤 한다. 하지만 바뀌는 건 나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바꿀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여행은 계속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뒷 일은 모른다는 점에서,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삶은 길고 긴 여행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해왔다.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큰 비가 쏟아졌다. 마당은 매우 습한 상태지만 곧 가을 공기가 아침 시간부터 천천히 채워질 것이다. 이 마당에서 여러 번 맞는 가을이지만 이번에도 새롭게 떨린다. 계절이라는 여행이 매번, 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세포 하나하나가 가을을 맞을 준비를 한다. 이 여행은 또 어떤 모양일까. 궁금하고 겁나고 설렌다.



*게리 퍼거슨의 <자연처럼 살아간다>를 다 같이 읽었다. 에어컨 바람 안에서 읽는 것도 좋았지만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또는 한옥 지붕 아래서 자연 바람을 맞으며 읽었던 시간은 한동안 잊지 못할 기억이 될 듯하다.


호모북커스 여름독서피정 (@homobookers71 사진 일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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