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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Aug 31. 2023

우울한 하루여도 결국 나아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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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매일 쓰고, 누구는 매일 그리고, 누구는 매일 뛰고, 누구는 매일 요리한다. 나는 매일 날씨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하루하루를 겨우 보낸다. 남들의 삶을 곁눈질하는 일은 피곤하고 이런 내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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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아침 약은 이제 먹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의사 선생님께 여쭤봤다. 한 열흘쯤 먹지 않았을 때 괜찮은지 보자고 하셨다. 사실은 약을 먹기 위해 아침을 챙겨 먹는 일이 귀찮았다. 자꾸 살이 찌는 것도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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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도 텃밭도 어디론가 없어지고 잡초가 무성한 정글이 되어버린 마당을 보고 있다. 비가 자꾸 와서 더 힘들었는데 오늘 겨우 하늘이 해를 비춘다. 하지만 언제 또 비가 쏟아질지 몰라 집안에서 선풍기로 말리던 빨래는 일단 그대로 두기로 했다. 내가 사랑했던 마당은 어디로 간 걸까. 마당이 변한 걸까, 내가 변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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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를 한 바퀴 크게 걸었다. 중간에 빵을 먹었고, 하나로마트에 들러 양상추 한 통과 귤 한 팩과 쓰레기봉투를 샀다. 날씨 탓에 야채들이 비싸고 앙상하다. 과일은 명절 때 가격보다 더 올랐다. 덥다고, 비 온다고 장을 보지 않은지 오래다. 내가 뭘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오늘 사온 양상추도 과연 먹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제는 남편이 어묵탕을 끓여주었다. 일하고 와서 힘들텐데 내색하지 않는 남편에게 나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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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지난 몇달간은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약을 열심히 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아침 약을 챙겨 먹어야 하나. 약 하나로 기분을 조절할 수 있다니 신기한 세상이다. 약을 잘 챙겨 먹으면, 나는 다시 밝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될까. 참으로 편리하구나.


나는 우울할 때의 내 글도 좋아하고, 밝을 때의 내 글도 그 나름대로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글을 좋아한다. 그러니 다행이다. 이럴 때도 저럴 때도 글을 쓸 수 있어서. 오늘 같은 기분이라도,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는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글은 내게 나아감이다. 약 한 봉지 털어넣듯, 밥 한 술 밀어넣듯 나를 살린다. 그렇게 오늘을 산다. 그래서 오늘도 쓴다. 우울한 글이어도, 우울한 하루여도 결국 나아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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