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다음 페이지로 나아간다
새벽에 소란이 있었다. 자다가 화장실을 가려고 깼는데 화장실 쪽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나는 드라마 <무빙>의 한효주만큼은 아니어도 귀가 무척 밝다.) 물을 틀어놓고 잤나 싶어 가보니, 세면대 아래 배수구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제법 많은 물이 콸콸거리며 쏟아지니 덜컥 겁부터 났다. 남편을 급히 깨워 상황을 이야기했다. 잠이 덜 깬 채로 남편은 공구들을 챙겨 작업에 들어갔다.
우리 집에 들어오는 수도를 잠그고, 배수구를 고치고, 수도를 틀면 물이 다시 새고, 수도를 다시 잠그고, 배수구를 고치고.. 몇 차례 반복한 끝에 더 이상 물이 새지 않고 고쳐졌다. 새벽 4시, 한 시간여 소란이 지나가고 우리는 겨우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나면 나는 한동안 외출을 하기 무서워진다. 다시 물이 샐까 봐, 전체 수도를 잠그고 외출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한다. 겨울에 보일러가 터지는 일을 여러 번 겪어왔지만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다행히, 목수인 남편은 이 정도 일로는 흔들리지 않는다. 남편이 무서워하는 것은 오로지 추위다. 남편이 추위를 무척 많이 타서, 우리는 9월이 되자마자 벌써부터 올 겨울은 어떻게 날까 걱정을 시작했다. 네 번인지 다섯 번째 겨울인데도 매번 새롭다. (이제는 몇 번의 계절을 났는지 헷갈린다.)
많은 이들이 시골집의 낭만을 이야기한다. 일부러 촌집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는 잘 가꾼 정원, 갓 딴 채소로 요리한 음식들, 현대적이면서도 정감 있게 리모델링된 시골집 모습이 잘도 나온다. 나는 시골집에 살지만 왠지 다른 세상 이야기 같다고 느낀다. 우리에게 시골집은 낭만이 아니라 주거비용을 아끼기 위한 경제적 선택이었다.
엊그제, 남편과 오랜만에 마주 앉아 술을 한 잔씩 하며(나는 정말로 술을 한 잔 밖에 못 마신다.)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그래서 올 겨울은 어떻게 날 것이냐이다. 커다란 기름난로를 놓자, 주민센터에서 올해도 기름을 좀 지원해 줄 것인지.
“너무 추울 때는 우리, 이 집에 살아서 아낀 이사비용과 월세를 생각하자.”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에 놀라고 뿌듯해하며.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니고 그때마다 최소 2~300만 원은 깨졌던 지난 몇 년을 생각하면 그래도 다시 한번 이 집에서의 삶에 대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며칠 해를 보여주던 마당에 오늘은 다시 비가 내린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해는 처음이다. 모처럼 쉬는 일요일, 남편은 예초기를 돌릴 거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 꽃밭도, 텃밭도 사라지고 잡초뿐인 마당을 보며 이제 ‘어쩌다 마당 일기’의 연재를 그만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역시 조금만 더,라는 머릿속 목소리가 들린다. 마당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서, 아직까지 아기 고양이가 풀 속에 숨어서 쉬거나 뛰놀고 개구리와 두꺼비, 가끔은 족제비도 지나다니는 길이 되기도 하니까. 내가 손대지 못해도 마당은 마당이다. 60년이 넘도록 이 자리를 지킨 이 시골집과 마찬가지로 나보다 먼저 여기에 와서 많은 생명들을 품고 돌보는.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더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며칠 전 뒷마당을 뒤덮은 환삼덩굴(생태계교란 식물로 지정될 만큼 지독한 놈이다.) 제거를 위해 전정가위로 한 시간 싹둑거린 여파로 아직까지 손목이 후덜거린다. 노동이 몸에 배지 않아서 겪을 때마다 새롭고, 몸 노동이나 농사가 직업인 이들을 존경하게 된다. 마당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언제나 넘어서지만 그 때문에 나도 무언가를 조금씩 넘어서고 극복해 가는지도 모르겠다. 잡초도 자라고 나도 자라는 거였으면 좋겠다.
가을이 왔다. 아침 공기가 서늘하다. 침대에서 이불을 끌어당기게 되는 계절. 나는 새로운 공기를 폐에 가득 담고 다시 다음 페이지로 나아간다. 어떤 이야기들이 쓰일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