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달씨 Sep 28. 2023

화장실 물때를 닦으며


그 어느 때보다 습하고 축축한 여름과 가을이라는 걸 화장실을 보며 느끼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세면대와 변기 바닥 정도만 닦아도 어느 정도 깨끗해 보이던 화장실이었다. 올해 들어 타일로 된 벽과 칫솔 등을 올려두는 수납장, 세탁기까지 온통 검은 물때로 뒤덮였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버텨보았지만 이제는 더 참아주고 싶지가 않게 되었다.


추석 연휴 첫 날인 오늘, 머리를 감다가 말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벽과 거울, 휴지걸이, 수납장 안쪽과 바깥쪽, 세탁기 문과 외부, 변기 아래, 그밖에 잘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닦기 시작했다. 한 번 쓰고 버려야 하는 매직블록(초극세사 스펀지)을 사용할 때마다 (미세플라스틱을 바다에 내보낸다는 류의) 양심의 가책을 조금씩 느끼지만 화장실 청소엔 이만한 게 없다. 습한 날씨, 땀이 잠옷을 적셔오고 콧잔등에도 송글송글 맺힌다.


열심히 닦은 뒤 마지막으로 샤워기를 틀어 시원하게 구정물을 흘려보낸다. 세상에서 가장 시원한 순간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오래된 시골집, 곳곳에 타일이 떨어져나간 낡은 화장실이지만 모처럼 후하게 대접받는 순간이다. 오랜만에 반짝거리는 타일을 마주하며 개운함과 흡족함이 밀려온다.


어제까지 삼일간 비가 내리고 겨우 오늘에야 그쳤다. 구름과 채 사라지지 않은 습기 사이로 햇살이 조용하게 얼굴을 내비치는 연휴의 오전. 벌써 세 번째 세탁기가 돌아가고, 평상 위에 펼친 빨래건조대에는 우리 세 가족이 입었던 티셔츠와 바지들이 볕을 쬐며 낮잠을 잔다.


매일 힘들어했던 비 오는 날도, 물때를 불러오는 고약한 습기도 언젠가는 한 줌 햇살에 꼬리를 내리는 것을 안다. 그 사이 무너지지 않고 힘내어 버텨낸 우리를 칭찬하고 싶은 오늘이다. 화장실 청소로 개운해진 기분이, 마음속 낀 물때까지 닦아내주길.

저 한 줌 햇살을 스펀지에 짜서 하염없이, 하염없이 나와 누군가의 마음을 닦아주고 싶은 오늘.



매거진의 이전글 잘 살고 있는지, 잘하고 있는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