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달씨 Oct 17. 2023

잘 익은 가을은 냄새부터 다르다


집보다 밖이 더 따뜻한 요즘이다. 햇살이 좋아서 오래간만에 낮 산책을 나왔다. 한동안 나와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어느새 뒷산으로 향하는 길가엔 가을 정취가 한가득이다. 잔잔한 바람 사이로 스며오는 가을내. 잘 익은 가을은 냄새부터 다르다.


조금만 걸어도 등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따숩다. 추수가 끝나거나 진행 중인 논길에는 메뚜기들이 폴짝 뛰어다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 자꾸 바스락거린다. 사람도 차도 잘 다니지 않는 시골길, 새소리와 벌레들이 내는 소리 외에는 고요하고 적막하기까지 하다. 자꾸만 내 발소리가 조심스러워 짐짓 천천히 걷게 되는 그런 길.


그렇게 낮은 언덕을 10분 정도 오르면 이름도 없는 작은 저수지가 나온다. 나는 이 소담한 물의 풍경을 보려고 여기를 온다. 오리들이 한가롭게 물 위를 떠다니거나 푸드덕 날갯짓하는 산 아래 작은 물가. 오리가 천천히 나아가면서 그리는 기다란 물줄기, 뱅글뱅글 돌면서 그리는 크고 작은 원들, 한 번씩 첨벙거리면서 만들어내는 거품 같은 것을 보고 있으면 걱정도 고민도 지워지고 마음이 소로록 편안해진다. 특히 오늘같이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맑은 날이면 따뜻한 해를 정수리로 등으로 어깨로 온몸으로 받으며 찌뿌둥한 곳곳을 고요하게 씻어낸다.

이렇게 착해진 기분으로 다시 집에 돌아가면 하기 싫던 작업도, 춥고 스산한 집의 기운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가을날은, 오늘같이 이런 완벽한 가을은 너무나 짧다. 그 점이 섭섭해서 자꾸 밖으로 나오게 된다. 언제까지나 거기에 있을 것만 같던 것들이 곧 사라질 것을 알기에. 가을은 슬픈 축복이다.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계절이 아닐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필 꽃들은 피고 살 것들은 살아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