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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Oct 23. 2023

컴퓨터가 말썽이다


작업용 컴퓨터가 말썽이다. 켤 때마다 온도가 높다고 표시되기도 하고 작동 중에 멈춰버리기도 하고 하더니만 오늘은 아주 켜지는 것을 포기한 모양이다. 몇 번이나 전원 버튼을 눌러 다시 켜기를 시도했지만 돌아오지 않는 모니터. 덕분에 오늘 하루 공쳤다 싶어 엎어진 김에 쉬어가기로 하고 점심용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양이 꽤 많은 책자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타이밍이라 걱정이 되지만 무엇이든 잘 고치는 목수 남편이 결국 해결할 것이다.


나는 컴퓨터와 디자인 프로그램을 이용해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이지만 동시에 엄청난 기계치다. 만지면 고장 내 거나 잘 되던 것도 멈추게 하는 마이너스의 손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컴퓨터와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남편 또는 다른 전문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문제없이 지낼 때에는 별 생각이 없다가도, 오늘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막막한 상황에 처하면 자괴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이래 가지고 컴퓨터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새로운 문명에 대한 두려움도 커서 휴대폰도 한 번 바꾸면 몇 년을 처음 상태 거의 그대로 사용하곤 한다. 새로운 어플도 잘 깔지 않는다. 사실은 운전도 못한다. 아마 평생 하지 않을 것 같다. 이제 무인 자동차가 거리를 활보하고, 초등학생도 코딩을 하는 시대가 오는데 나는 이대로 도태되는 걸까.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할머니로 늙는 건 싫은데.


최근 허리를 다쳐 한의원을 다니고 있는데, 나 말고도 많은 허리 환자들이 의료용 침대에 누워 아이고 아이고 한다. 나는 젊은 축이고, 다들 노인분들이시다. 어디 어디가 아프다고 한의사에게 하소연을 하고, 빨리 죽어야 하는데 이러고 있다고 맘에 없는 말들을 하신다. 나는 침대에 엎드려 엉덩이에 침을 꽂은 채로 나의 미래를 생각한다. 늙은 나는 어떤 모습일까. 여기저기 아프고, 새로운 기계는 하나도 다루지 못해 때마다 자식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 사람으로 늙으려나. 돈도 없어서 자식이나 친척들에게 의지해야 하는 사람이면 어쩌지.


생각이 안 좋은 쪽으로 뻗어나가는 걸 간신히 붙잡고 현재로 돌아온다. 요즘 약을 안 먹어서 생각이 뻗어나가나 싶다. 그래도 다시 약을 먹는 건 싫으니까 어떻게든 좋은 생각으로 돌려야 한다.


‘그래, 나는 아직까지 내 능력으로 불안정하게라도 일을 하고 있어. 일이 많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지. 며칠 전에는 “역시 사장님이 우리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원하는 대로 디자인을 해주시네요.“ 라는 말도 들었잖아. 그리고 뭐든지 고쳐주는 만능 수리기사 남편도 있고, 무슨 얘기든지 들어주고 좋은 쪽으로 결론을 찾아주는 만능 상담사 언니도 있어. 돈은 없지만 영원히 없지는 않을 테니까 조금만 힘내자. 잘하고 있어, 수진아.’


컴퓨터도 병나고, 나도 (허리)병이 나고. 이래저래 불편하지만 세상 일에는 다 그럴만한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쉬어가란 뜻이든, 소중히 여기란 뜻이든. 이 시련을 이겨내고 더성장하라는 뜻일 수도 있고 말이다. 얼마 전 카페를 개업한 형부에게 보낸 개업 화분, 남천나무의 꽃말이 ‘전화위복’이라고 했다. 좋은 일만 일어날 수 없다면, 나쁜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떻게든 ‘전화위복’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게 어렵다면, 그 상황에 대해 나나주변을 탓하지 않고 오직 고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걸로도 좋겠다.


좋은 가을날이다. 지겹도록 비가 오던 여름의 흔적이 끈질기게 붙어 있더니 결국 이 좋은 가을을 보내주었다. 여름이 힘들었다 보니 몇 배나 더 좋다.

역시나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한 고통도, 영원한 평안도 없다. 컴퓨터도 시간이 지나면 마모되어 제 기능을 떨어뜨리고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이지만 결국 다른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무엇이 오더라도 그 또한 고요하게 받아들이자. 그러면 충분하다. 더 바랄 것이 없다.



나의 작은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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